soft feminism
며칠 전 지하철에서 내리며 겪은 일이다. 출입문이 열리기 전 유리창 밖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서있었다. 나는 여자 쪽으로 내리려 했다. 왜냐면 여성이니까 내가 내릴 공간을 내어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0.1초도 안 되어 어그러졌다. 출입문이 열리자 여자는 내게 공간을 내어주며 비켜주기는커녕 내 몸을 툭 밀치며 열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거의 ‘돌진’이었다. 남자가 뒤늦게 팔을 뻗어 여자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느라 내 몸 앞으로 남자의 팔이 훅 들어오게 됐다. 나는 여자의 몸에 부딪혀 비틀거리는 와중에 남자의 뻗은 팔도 피해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하게 됐다.
다행히, 무사히, 두 연인을 피해 하차를 마쳤을 때 내 이마엔 식은땀이 흘러있었다. 열차 하차가 대체 뭐라고?
그로부터 며칠 간격으로 나는 또다른 비슷한 고난을 겪었다. 커플의 경우 여성분들은 낯선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남성분들은 낯선 타인의 눈치를 보며 조심하는 경험.
흔히 여자가 남자보다 더 돌봄에 민감하다고 말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타인을 더 잘 배려한다고 말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뇌과학이 동원되기도 한다. 심리학도 이구동성으로 그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준다. 캐럴 길리간(Carol Gilligan)은 <다른 목소리로>에서 하나의 이론을 발표했다. 남성의 도덕성은 정의(justice)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반면 여성의 도덕성은 돌봄(care)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여성이 남성들보다 돌봄에 강할까? 반대로 남성은 여성들보다 정의로울까? 지금 당신이 알고 지내는 여성 개인들과 남성 개인들을 떠올려보라. 이와 같은 성별차 이론이 실제현실에서 얼마나 잘 확인되는지···.
내 주위에서 사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성별차를 다루는 이론들을 용도폐기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성별 경향성을 살피는 용도로는 충분히 유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별 경향성은 사회화의 면에서 유익하게 관찰해볼 수 있다.
페미니즘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주제 중 하나가 ‘성별차’와 ‘개인차’다. 페미니즘은 흔히 개인차보다는 성별차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명색이 페미니즘이니까···.
그런데, 페미니즘이 성별차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개인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들은 언제나 같이 개진된다. 외부에서 볼 때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 간의 개인차에 대해서 아무 얘기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막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아주 열심히 얘기하고 있다.
여성(개인)들 간의 차이는, 어떤 경우에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보다 더 크게 나타날 때도 있다. 예컨대 나는 독일의 수상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과는 다르다. 아마도 거의 모든 면에서 그녀와 나는 다를 것이다. 그녀와 나 사이 ‘여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달랑 하나뿐’인 ‘아주 작은 공통점’이란 의미만을 가질지 모른다.
문제는 개인차를 강조할 때 바탕 및 목표로 작용하는 ‘아이디어’다. 즉 어떤 사람이 개인차를 강조하는데,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그러는가 하는 지점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개인차를 강조하면서 특정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피해현실을 덮으려 하는지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혹은 개인차를 강조하면서 구체적 상황을 무마하려 하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비근한 예로, 최근, 조지 플로이드 죽음 이후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대하여 간간이 나오는 ‘All Lives Matter’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특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혹시 ALM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BLM을 약화시키려 한다면 이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차보다는 인종차를 강조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이 있어 BLM이 나온 것이니까.
Eddie E-Wood Cooper’s facebook에서.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A를 파악하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성별, 인종, 민족, 경력, 학력, 연령 등을 통해 A를 파악하는 관점이다. 둘째는 직접 만나 관계를 맺으며 A라는 사람 자체를 알아가는 관점이다.
지구는 넓고 사람은 많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할 때 직접 만나 깊이 관계 맺는 절차를 일일이 다 거치지 못한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첫째 방법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상황이 허락되고 여건이 가능하다면 둘째 방법을 사용하자 권하고 싶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남성은 정의, 여성은 돌봄’에 대하여 일말의 의구심을 갖고 있다. 한 개인이 어느 나라에서, 어떤 법제도 하에서, 어떤 종교의 영향 안에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어떤 인간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는지가 그 사람을 정의 쪽 혹은 돌봄 쪽으로 치우치도록 이끈다고 본다. 그 개인이 여성이면 그 사회가 용인하는 방식의 여성스러움 위에서 정의 및 돌봄을 접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표현하게 될 것이다. 반면 그 개인이 남성이면 그 사회가 허용하는 범주로서의 남성스러움 안에서 정의 및 돌봄을 접수하고 표현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 ^________^
성별로 보이는 특징이든, 개인별로 보이는 개성이든, 그것은 사람이 후천적으로 형성해나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명언 “##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으로 만들어진다”에, 나는 99.9%, 즉 아주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거! (하하하하~)
* 그림출처: https://pin.it/5ESwfEX
<Pinterest> Andrés Fernández Cantarero 님이 Polonia (Poland)에 저장한 것.
* 참고로, 다른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Pixabay 무료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