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애를 낳아봤어? 키워봤어?

soft feminism

by 이인미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른다


니가 애에 대해 뭘 알아? 낳아보길 했어? 키워보길 했어?


(자녀양육과 교육에 대해 걱정, 푸념하는 사람에게 몇 마디 대꾸했다가) 이런 말을 들으면, 내 머릿속에 여러 문장들이 떠다니지만 굳이 발설하지 않으려 조심한다. 아이 때문에 이미 속상한 사람이 오죽하면 임신-출산 무경험자를 불러내 하소연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식의 태도가 혹시 평상시 자기 아이를 대할 때도 노출된다면, 그것이 갈등의 불씨일 수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르니 내가 알려주는 대로 너는 따라야 한다’를 전제하고 대화에 참여하는 습관이 있는 부모인 경우 자녀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기 쉽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굳이 건네지 않을 때가 많다. 설명충, 도덕충 같은 거 되기 싫어서다. 나는 쓸데없이 소심하다.


그냥 '브런치'에다 쓰는 것으로.





누구나 자기의 인생길을 걸어간다


동갑내기 친구들 중엔 자녀를 시집장가 보낸 사례가 있다. 곧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될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빠른 게 아니라, 내가 느린 거다. 지금부터 열심히 달려도 그들을 따라잡긴 틀렸다. 서로 ‘다른’ 인생길을 가는 거라 여겨, 어차피 따라잡을 마음도 의도도 품지 않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서로 다른 인생길을 자기 나름으로 걸어간다. 따라잡는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또, 누구는 길다운 길로 가고, 누구는 길 아닌 길로 가는 것도 아니다. 만약 여성이 가야 할 길다운 길이 ‘결혼-임신-출산-양육’이라면, 지금 나는 길답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어머나! 그런 말은 도대체 ‘말이냐 콧방귀냐’ 싶다.


나도 나의 길을 점잖게, 때로 폼나게, 물론 시행착오도 하면서, 나름 성실히 걸어가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동갑내기끼리만 서로 다른 인생길을 걷는 게 아니다. 한 집에서 부모랑 같이 생활하는 자녀들도 부모하고는 ‘다른’ 인생길을 걷는다.





누구나 ‘개인’이다


물론 자녀와 부모는 가족이다. 허나, 서로 몸뚱이가 붙어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개체가 아니다. 별개의 개체라는 소리다. ‘개인(individual)’이다. 이 간단한 걸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다. 자녀세대보다는 부모세대 쪽이 좀 더 어려워하는 것 같다. 자녀를 ‘내 몸같이’ 사랑하며 돌보다 보니 그리 되었을 수 있다.


그래도 두 몸이 결국은 따로따로 아니겠어요? 좀 슬픈 예를 들어 죄송하지만, 예를 들어, 아이가 암에 걸렸으면 그 아이가 항암치료를 받아야지,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나서는 건, 좀 아니지요?


나는 부모 입장이 되어본 적 없으니 자녀 입장에서만 이야기해보겠다. 나는 부모와 나를 별개의 개인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여든 넘은 부모님 앞에서 “당신과 나는 별개의 존재예요”라고 대뜸 말하지는 않는다. (개인을 타인으로 알아듣고) 상처받으실까 봐···.


아마, 대개의 자녀들이 나와 같은 마음일지 모른다. 섣불리 “당신과 나는 별개의 존재예요”라고 언급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자녀들이 나이가 어릴지라도 속이 반드시 얕지만은 않다. 혹은, 자녀들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의 인생관을 내면화해서, 자기와 부모 사이에 심리적 거리를 두지 않고 엉겨붙어 사는 수도 있다. 사춘기 때는 대개 부모와 심리적 거리를 두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매우 강력하게 제지당했다면 심리적 거리두기를 체념했을 수 있다. 그건, 어쩌면 심리적 독립이란 발달과제에서 좌절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마보이’ 같은.





나이는 삶의 기록이다


한 집에서 동거하며 지낸다 하여도 서로를 개인으로 대할 수 있다. 가족문화라는 게 있어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할지라도, 목소리의 음색과 어조가 비슷할지라도, 가족 구성원들 각각은 저마다 하나의 개인이다. 제각각 뿔뿔이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과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개인임을 인정하면 서로에게 예의를 갖출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예의는, 절제된 자세, 적합하게 사회화된 문화적 태도다. 즉 한 사회에서 통용되고 권장되는 인품이나 품격 같은 거다. 이런 예의는 상호적이다. 혹자는 예의란 나이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갖춰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째서 절제된 사회적 문화적 태도, 인품, 품격을 갖추는 과업에서 나이든 사람이 열외될 수 있다는 말인지···?


나이는 삶의 기록이다. 삶의 기준이 아니다.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의 경험도 기준이나 표준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낳아본 적 없어도, 키워본 적 없어도 다음세대 육아에 대한 의견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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