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ft feminism
(사진 설명: 경기도 부천시 심곡천에 자주 나타나는 새,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음.)
1980년대에, 대대적인 마피아 수사가 한창이던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거의 대다수가 남성요원이었던 FBI 마피아 전담수사팀에 한 여성요원이 발령을 받아 배치됐다. 샬럿 랭(Charlotte A. Lang)이었다.
샬럿을 대면한 수사팀장(supervisor)의 첫인사는 이러했다. “난 자네를 요청한 게 아니었어. 여자가 이런 수사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난 생각지 않아”라고···. 심각한 성차별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때 샬럿은 그의 인사말을 이렇게 번역해서 받았다. “안녕, 뉴욕에 잘 왔어.”*
*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공포 도시: 마피아와의 전쟁> 3부 중에서.
그때 즉시 샬럿은 수사팀장을 고발했었어야 했을까? 저런 사람을 어떻게 ‘정의로운’ 미연방 수사기관(FBI)의 팀장으로 일하게 놔둘 수 있는가, 문책당하도록 조치했어야 옳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샬럿은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반전이다!) 그녀는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역사다큐멘터리에 등장하여 또렷하게 그 말을 재생했다. 억울하다 호소하는 게 아니라 ‘성인지감수성의 시대적 한계’에 관하여 증언보고서를 쓰듯.
이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식으로 설명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차라리 그때 고발하지, 뒤끝작렬이다, 하는 의견을 가졌을 수도 있다. 정의의 감각에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정의로운 의견이 가능하다.
성차별적 발언, 성희롱적 발언에 대한 허용치의 수위는 ‘여성 개인’마다 동일하지 않다. 공적 영역에서 남성에겐 하지 않는 ‘여성에게만 하는 특정한 언행’ 앞에서, 샬럿처럼 태연한 여성도 있고, 우물쭈물하는 여성도 있고, 한껏 위축되는 여성도 있고, 무작정 회피만 하는 여성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 고소하는 여성도 있다.
여성을 차별·희롱·추행·폭행하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주제에 관한 한 여성들의 감각과 반응은 개인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어떤 여성의 멘탈은 훌륭하고 다른 여성의 멘탈은 저열하거나 이상하고···, 그런 말이 아니다. 여성들 사이에 개인차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공적 영역에서 여성들간의 개인차는 공적 허용수준으로 일반화/표준화될 필요가 어느 정도는 있다(매뉴얼?!).
하지만 본질은, 모든 업무현장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이다. 여성 비서와 일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비서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사람을 개인으로 존중하며 협력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직급이 비서든 무엇이든 상호존중을 요구할 수 있는 민주적 업무구조가 형성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상태 한국사회에서 비서나 매니저의 경우는 ‘공사(public/private)’ 양면에서 전천후로 일해야 하는 ‘을’의 처지에 종종 놓인다. 비서는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사적 공간에 드나들어야 하고, 연예인 매니저는 연예인의 집안일까지 마치 머슴처럼 돌보아야 하는 걸 당연시하는 실정이다.
이외에도 특별히 개인과 개인이 계약을 맺지도 않았는데, 갑을관계가 발생하기도 한다. 비싼 자동차 차주 앞에서 경차 차주는 갑자기 ‘을’이다. 어떤 아파트 주민 앞에서 경비원 아저씨는 을이다. 성적을 조절할 권한을 가진 교수 앞에서 대학원생은 을이다. 아주 작은 차이일지언정 차이에 근거해 서열이 정해지면 서열 높은 쪽은 갑, 서열 낮은 쪽은 을이 된다. 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일례로 내 회사에서 부장으로 있을 때는 부하직원들에게 갑이지만 거래처에 갔을 때는 을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자신이 문득 을의 처지에 놓여서 갑질을 겪을 때, 그순간 명확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을 따라 불이익을 감수하고서 갑에 반기를 드는 을이 몇이나 될까? 그게 혼자서는 잘 안되니까, 어떤 이들은 우울감을 겪다가 스스로 세상을 뜬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갑질피해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지원을 구한다.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은 남성에 대하여 ‘을’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흥미로운 용어를 하나 소개해보련다. ‘페미닌 엔딩(feminine ending).’ 영어 운율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시의 끝 음절에 강세가 약한 음절을 두는 것’을 말한다. 왜 ‘강세 약한 종결’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강세 약한 쪽이란 모름지기 여성’이라는 아이디어가 매우 대중적 아이디어였던 탓에 페미닌 엔딩이라고만 해도 다들 알아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페미니즘은 남성 앞에서 약자의 자리, ‘을’의 위치의 위치에 놓이곤 했던 여성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학문으로 출발했다. 그러면 여성이 갑이 된 경우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조건 하에서는, 여성에겐 강세가 약하게 주어졌다. ‘페미닌 엔딩.’
나는 믿는다. 페미니즘은 세상 모든 을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론이며 학문이라고···. 왜냐면 페미니즘이 출범 당시부터 소위 페미닌 엔딩 류의 대중적 아이디어들을 지속적으로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을 약한 자리에 두는 사회구조에 대하여 반대해왔다는 이야기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하나의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문화를 위하여 일해온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페미니즘이 바로 그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만약, 혹시, 어떤 사람이 페미니즘을 말하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도, 세상 모든 종류의 ‘을’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데에 머뭇거리며, ‘을’들의 처지에 대하여 공감할 줄 모른다면, 그(녀)를 여성우월과 여성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초지일관 늘 주장해왔던 바, 남성우월과 남성중심주의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여성우월과 여성중심주의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