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ft feminism
포르노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성적 흥분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성보다는 흥행성을 더 따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성적 흥분을 자아내는가? 얼마나 많이 이 영화가 팔리는가?
이십 년도 더 된 일이다. 여성단체에서 자원활동할 때, 나는 ‘연구’를 핑계로 포르노 영화들을 완전 몰아서 한 달쯤 집중적으로 본 적이 있다. 그때, 연구결과 중 하나는 남성과 여성이 즐기는 포르노 영화가 성격과 특징 면에서 ‘의미있는’ 차이를 보인다는 지점이었다. 이유인즉, 여성들이 ‘노골적 포르노’보다는 줄거리가 있고 맥락이 있는 영화들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요즘도 여성들이 그런 포르노를 더 즐겨 보는지는 잘 모르겠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하물며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니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자극을 극대화하는 ‘노골적 포르노’가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더 수익성이 높단다. 자극이 강렬해야 사람들이 더 찾아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인기가 판매를 결정하는데, 이 판매수익은 제작자와 배우의 수익으로 연결된다. 제작자와 배우가 어떤 방식으로 수익을 배분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배우 쪽이 제작자보다 더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떻든 제작자나 배우에게 다른 무엇보다, 인기가 제일 중요한 요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인기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인기 이외에 다른 요인들이 좀 가볍게 무시될 가능성이 열린다. 그 와중에 포르노 영화 제작환경이 배우친화적이기보다는, 자극친화적으로만 치닫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시청자들에게 더 강하고 아슬아슬한 자극을 보여주기 위해 배우들에게 마땅히 챙겨주어야 할 위생적 요인들이 자칫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도 생긴다.
포르노가 ‘of, for, by’ 오직 성적 자극에 초집중하는 영상을 의미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푸드 포르노, 빈곤 포르노, 감성 포르노라는 유의어들이 생겼다. 이런 포르노들은 이를테면 특정한 주제에 집착하여 그 주제를 통해 특정한 반응만을 이끌어내려고 ‘대놓고’ 만든 영상들을 가리킨다.
푸드 포르노는 음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음식은 ‘먹을 것’으로만 보여진다. 우리가 음식을 나누며 애정을 나누고 정보를 나누며 인간관계를 다지는 면은 삭제된다. 빈곤 포르노는 기부하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빈곤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감성 포르노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감성에 집중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영상이 끝나고 나면 부풀려진 감성을 추슬러야 하는 과제가 남을 수도 있다.
‘## 포르노’ 류의 동영상들은 특정한 반응을 도출하기 위해 이른바 ‘악마의 편집’도 불사한다.
이런 목적의식이 분명한 영상들은, 아마도 보는 사람을 ‘파블로프의 강아지’로 전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만큼 충분히 강하게 자극을 주었으니, 이제 우리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보라구!, 라는 식이다. 하나의 자극은 여러 반응을 자아낼 수 있는데, ## 포르노 류의 영상들은 자극과 반응을 일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짐짓 도덕군자인 양 포르노란 건 아예 씨를 싹 말려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나 혼자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포르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포르노를 완전히 양성화해서 어디서나(으응?) 누구나(어머나?)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할 수도 없다.
분명히 눈살 찌푸려지는 포르노 작품은 있다. 끔찍한 포르노 작품도 있다. 등장하는 배우뿐 아니라 관람하는 시청자를 지나치게 압박하는 포르노 영상들도 없지 않다. 폭력범죄를 기록한 것 같은 포르노들도 있다.
그리고 포르노를 많이 자주 본 남성들 중에서, 영상과 현실의 차이를 자칫 망각하여 사회문제적 행동을 장착하게 될 수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포르노 속에 나타난 피학적 언행(마조히즘)을 실제에서 기대하는 ‘착오’가 발생하지 않도록, 일정 정도의 사후조치 같은 게 사회교육 차원에서 필요할 수도 있다.
포르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공개적으로 토론될 때 그것이 그나마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관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