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내란 사태 당일, 헌법기관을 점거했던 군인들에게
(사진, 한겨레신문)
좀 차갑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혹은 해명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아니다. 그걸 혹시 이론으로 간주해, 그 이론이 적용되기를 바라서도 안되고, 지은 죄가 가벼워지기를 바라서도 안된다. (모두에게 똑같이 냉혹하게 형량을 때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담 정도에 따라 형량이 아주 다르다.)
12.3내란 사태 당일, 국회에 갔던 '반란군'들은 소극적으로 (BUT, 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다 해도 국회 경내에 군복을 입고 머물렀으니 '반란군' 정체성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명령을 받았으나 아예 출동장소로 가지 않고 태만하게 혹은 게으르게 (BUT, 민주주의 수호에 성실하게) '불법' 명령을 다룬 수백 명 군인들괴 동급에 놓을 수 없다.
'악의 평범성'을 입증하려 하지 마시라. 혹은 '악의 평범성'에 기대지 마시라. "죄는 지었지만, 이제라도 뉘우치고 폭로하겠습니다"라고, ‘제보자’ 정체성으로 신속히 태세를 전향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사유의 경지' 밖에 있었더라도, 지금이라도 '사유의 경지'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사유하시라. 생각하시라. 당신들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날은 너무 깜짝 놀라서 일순간 사유를 놓쳤을 수 있다.)
1960년대 중반(아이히만 재판과 사형집행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아렌트의 "아우슈비츠 재판" 중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식별 과정(죽일자, 살릴자 나누기)에 참여했었던 의사가 있었다. 그는 수용소 근무자였으나, 임명을 받아 몇 개월 근무하는 동안 최대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나치가 하달한 기준표를 따라, 살아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이런 기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내란 발생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내란범죄자가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만큼이나!) 사람은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썼다. 이는 수용소 생존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증언한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그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변명,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판사가 묻는 질문에 차분히, 그러나 성실히 대답했다. '명령이었거든요..' 이딴 소리는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