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사진 출처: 세계일보 2024.1211.)
아렌트의 말2.
모든 사유는 경험에서 발생한다.
12월 10일 오후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젊은이가 단상에 올라 '탄핵저지'를 목놓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간절한 음성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약속장소로 바삐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듣고 있노라니, 그의 의견에 동의가 되진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비약이 심했다. 그리고 빈틈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의 감정적 '울분'만큼은 내게 '전달'되었다. 크게 상처입은 것 같았다. 누구에게 무엇에게 어쩌다가 상처입었는지 해석하는 데서 ‘삐끗’했지만, 억울하게 상처입은 건 분명해 보였다. 곧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 우렁차되 두려움 가득한 음성.
아직 어린, 그의 상처 가득한 감정을 누가 다독여줄 수 있을까? 더는 상처받기 싫어 강하게 내지를 수밖에 없는 그의 뻗치는 감정을 누가 돌봐줄 수 있을까? 거기 모인 할머니&할아버지들은 똑같이 상처받고 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야, 나도 너 못지않게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혜롭고 인자한 연장자의 눈빛으로 어린 청년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이크 쥔 청년을 눈 부릅뜨고 노려보는 어르신 여러 분!! (혹은 눈감고 주무시는 한두 분!!)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기독교 용어가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상처를 건강하게 치유받은 치유자’라고 바꿔 말해야 할 것 같다. 심리적 상처 혹은 트라우마를 그대로 지닌 상태라면 남을 치유할 수 없다. 더 섬세히 치유받고, 더 깊이 치유받아야 한다. 남을 치유하겠다고 섣부르게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리 나서는 순간, 자기분열에 빠진다.
586세대 한 사람으로서, 계엄 트라우마, 솔직히 있다. 아직 건강하게 온전하게 치유 못한 것 같기도 하다. 12.3내란 사태 직후부터 며칠간 시름시름 아팠던 걸 보면..
그러나! 응원봉 든 청년들에게서는 계엄 트라우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흠칫 놀랐다. 그래서 저렇게 밝을 수 있구나 감동한다. 그 밝고 맑은 에너지를 대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운다. 너무 좋아서. (사실은 울다가 웃다가 한다.)
그래, 당신들은 계엄 트라우마에 눌린 나와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구나. 오늘도 그 애기들(정말 이쁘다!!)에게 배운다. 아니 치유받는다. 아렌트는 말한다(정신의 삶, 153; The Life of the Mind, 87)
모든 사유는 경험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험도
상상과 사유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의미를 생산하거나 일관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All thought arises out of experience, but no experience yields
any meaning or even coherence without undergoing
the operations of imagining and thinking.
젊은이들 당신들은 나의 세대와 경험이 다르니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마음껏 상상하고, 있는 힘껏 사유하시라. 내게 응원봉 하나 없지만, 당신들을 응원한다. 그냥 당신들 옆에 얌전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덧붙임*
그리고, 아까 낮에 잠깐 본 그 청년의 상처, 트라우마, 안타깝고 속상하다. 그를 안아주는 사람이 단 한 분이라도 거기 계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