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스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상징적 공간
12.12 대국민담화 이후 탄핵촉구 여론과 탄핵저지 여론 사이에 조성된 경계선이 흡사 ‘(심리적) 군사분계선’으로 진화하는 증인 듯 보인다. 12.12 윤석열 대국민담화 이후, 12.13 김어준 국회증언은 그 양 여론을 극단적으로 대표하는 것 같다. 둘 다 팩트체크가 필요한 내용을 아직 담고 있다. 어느 쪽이 더 문제적인지 더 파괴적인지, 유해한지를 떠나, 양쪽 여론진영을 도발하고 흥분케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둘 다 '공동체(나라)를 위한 충정'을 형식적으로 강조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두 사람의 영향력이나 신뢰도가 물리적으로 실질적으로 동일하거나 유사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형식적 유사성'만을 지적한 것.
어떻든 그래서 지난 열흘간, 여론의 양쪽 집단 안에서 각각 상반된 이유로 ’성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양산, 확산되는 중인데 12.12 이후 그 현상이 치명적으로 격렬해지면 어쩌나 걱정이 크다.
(대문사진 출처: MBC)
그 걱정을 이기지 못해, 어제(12.13) 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여의도로 나갔다(이승환 공연 전 퇴장). 거기 앉아있으니, 시민집회의 탄핵촉구 함성소리가 크면 클수록 내일(12.14)의 탄핵가결을 더 잘 압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다. 허나 천둥 같은 함성소리가 온 하늘과 온 땅을 뒤덮는 바람에 다양한 목소리들을 잠식되는 현상 또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포착되었다. 그 순간 기억 한 자락이 득달같이 떠올랐다. 80년대 암울, 엄혹했던 독재정권 치하 민주화운동 당시 이슈일원화 (함성소리 증폭) 차원에서 “여성이슈는 나중에 말해”라는 목소리가 꽤 비중있게 나타났었다. 체포와 구금이 일상적이던 그때, 대부분의 젊은이들(숫자로는 남성들 비율이 조금 높았던 듯함)이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가던 그때, 이슈에 순서를 매기자는 목소리에 대체로 힘이 실리는 분위기였다. 이슈순서 논리를 수긍하며 느꼈던 허탈감, 소외감이 내 머릿속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때의 나 또한 여성이슈를 한 걸음쯤 뒤로 물리는 게 낫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었고, 그 판단을 따라 행동했었다. 계속 마음이 무거운 채로.)
인간세상에 완벽한 대안이란 어차피 없고, 위험하고 긴급한 문제부터 우선 해소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어쩔 수 없다. 큰 문제부터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큰 문제요인에 작은 문제점들이 묻히도록 종용받는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은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12.3내란사태가 폭주하면서 비현실적으로 선명해지기만 하는 양대 여론결집 상황을 이렇듯 최대한 격해지게끔 몰아붙인 고약한 내란범죄자가 한탄스럽고, 이를 일주일 더 지속가능하게 만들었던 국회 내 이익집단이 원망스럽다. 경제, 외교 분야 걱정근심도 무겁지만, 우리의 공론장이 건강을 되찾아 복구되려면 또 얼마나 힘을 들여야 할지.. 걱정근심 한가득.
한국어 '공론장'으로 가끔 번역되는 '공적 영역(the public realm)'에 대하여 아렌트는 다양한 의견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개념정의했다. 그런데 이번 12.3내란사태의 주범, 난폭한 자(대통령)는 12.12에 텔레비전에 나타나 ‘공적 영역‘을 급기야 찬성/반대 여론 진영의 격투장으로 선언하고야 말았다. 정말 그것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상계엄 선포만큼이나 흉악한 판단이었다. 피흘리며 서로를 때리라고, 상대를 공격하라고 부추기며 선동하며 도발하는 잔인한 짓이었다. 비민주적인 선언이었음은 두말하면 입 아프고.
아렌트에 따르면, 공적 영역, 공론장, 폴리스는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 '현상의 공간(the space of appearance)'이다. 누구나 자기 모습 그대로 "현상(appearance)"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공간은 일단 한 번 설립되고 나면 그대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최초 설립 모습 그대로를 잘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그 어떤 인간도 항상 이 공간에서 살지 않으며, 항상 살거나 머물 수도 없다. 사람들이 흩어지면 현상의 공간은 소멸한다.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흩어져 입을 다물면 현상의 공간으로서 공적 영역(공론장)은 숨죽인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 평등하게 의견을 발표하고 경청하기 시작하면 현상의 공간으로서 공적 영역은 되살아난다. 이 같은 공적 영역의 원형이 그리스의 '폴리스(polis)'다. 공적 영역의 원형이자 민주주의 공론장의 원형으로서 폴리스는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이후 상징적 의미로, 또 개념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다음은 아렌트의 말이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는 폴리스일 것이다.
Wherever you go, you will be a polis.
엄밀히 말해, 여의도 집회현장은 '폴리스'가 아니다. 물론 시민발언으로 집회가 진행되긴 한다. 하지만 집회참가자들은 이미 주요 이슈 하나로 뭉친 상태고, 그 주요 이슈는 이미 시위구호로 정착되어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집회현장은 이슈파이팅을 위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핵촉구!" 이 이슈 이외엔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공간이다. 나오지 않는 게 바람직한 공간이다.
반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두 명이면 두 개의 의견이 살아있어야 하고 백만 명이라면 백만 가지 의견이 원칙적으로 살아있어야 그곳이 '폴리스'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폴리스에서 (혹은 폴리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공적 영역을 철저히 신뢰하는 표현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사람 숫자에 맞먹는 다양한 의견이 살아있어야 한다.
탄핵가결 (오늘, 12.14, 이번엔 가결되겠죠?) 이후 탄핵촉구 시민집회를 건강하게 종료하고, 폴리스(공론장, 공적 영역)가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책임있는 자들의 정치적으로 책임있는 행위가 잇따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