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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도 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럴수 있다면 좋겠는데

by j kim

교사로서의 자존감, 자신감은 늘 낮았다. 학급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내가 가르치는 아이에게 일이 생기면 나는 무조건 나의 잘못부터 찾는다. 아이탓, 학생탓을 하는건 '교사로서' 꽤나 쪽팔리다. 교사는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성숙한 학생탓만 하기엔 교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선 내 잘못부터 살펴야 나도 교사로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일방적으로 아이를 비난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 문제, 혹은 그 잘못을 어떻게 같이 푸는지가 아이에게도 그리고 교사에게도 성장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년간 교사로서 꽤 열심히 살아왔다. 누군가가 왜 교사로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물으면 나는 오히려 당황스럽다. 이제는 교사로서의 내 생각 자체가, '교사라면 그냥 당연히 교사로서 최대한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식으로 됐기 때문이다. 나도 교사로서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교사의 일이 어디까지인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교사로서의 '일'의 범위가 따로 없는 것이 옳겠다는 것으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때로는 부모와 같이, 때로는 부모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 교사의 일이자 역할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게 되었다.


때로 그렇게까지는 내 일이 아닌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냥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교사라는 자리가, 역할이 한 아이에게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클 수 있기에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그것과 동시에 나의 동기와 동력에는 일종의 '회한'이 자리잡고 있다. 남한산에 오기 전 나의 교사로서의 삶은 꽤 불안하고, 불편하고, 충분치 못했었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경험이 부족했고 특히나 아이들에게 너무 부족했다. 교사로서 전혀 만족스러운 삶이 아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참 후회스럽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서툴렀는데 어찌할 바도 몰랐던 것 같다. 특별히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나도 많이 힘들었고 아이들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회한이다. 그렇게 살았으면 안됐었다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또 후회스러운.


새로운 학교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도 잘 살았다는 충만한 자신감은 없다. 그래도 방향을 찾게 되었고 내 인생 최대한의 힘을 들여 아이들을 이해 열심히 살았다는 충만함은 있다. 그래도 교사로서 잘 산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 전의 '회한'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교사로서의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은 그저 교사로서 열심히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책임감, 사명감, 의무감이지만 그 기저에는 '회한'도 있다. 어린 시절 교사로서 잘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것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회한이 그저 회한으로 남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내 삶의 동력으로 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온게 벌써 수년째다. 그 덕인지 이제는 조금이나마 뚜렷하고 명확하게 무언가가 보인다. 적어도 내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냐는 불만이나 볼멘소리 따위는 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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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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