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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없어진다고? 공감능력의 중요성

최근 대치동 일타 강사 현우진 선생님이 인터넷 강의에서 한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수능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시대는 끝날 것이며, 아마 7~8년 안에 수능도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어떤 세상이 올지 모를 것 같다며 그동안의 질서가 ‘펑’하고 터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638110



1994년에 수능이 도입되었고 이제 30년을 향해가니 수능의 수명도 거의 막바지에 달해 가는 것 같긴 하다. 변화라는 것은 꼭 예상되는 부분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도 하고, 의외의 부분에 대해 일어나기도 한다. 어릴 때 과학상상 그리기를 하면 항상 그렸던 것은 나는 자동차였는데, 그 자동차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예상 못했던 전화기 속에 모든 것을 담는 세상은 너무 빨리 와버렸다.

그래서 수능이 없어질지, 아니면 딱히 대안이 없어서 수능이 실낱같은 명맥을 유지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학교 수업을 충실히 따라가다가 수능을 잘 보고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답인 것은 아닌 세상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갈수록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거세질 것이고, 기본소득이 제공이 된다면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녀서 얻는 메리트가 별로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이런 예측하기 힘든 시대이니 알아서 크라고 내버려 두어야 할까. 미래에는 어떤 사람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해 부모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모두의 고민일 것이다.





물론 정답은 모른다.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감히 예상해보자면, 나는 앞으로의 세상은 “타인의 감정을 살(buy) 수 있는 사람”이 움직일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감정을 동하게 하고, 그 감정의 포인트를 알아 지불하게끔 하는 산업, 그리고 사람. 그 부분이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그럼 타인의 감정을 사려면 어떤 능력이 발달해야 할까. 


“공감능력”



나는 그 핵심능력이 공감능력이라 생각한다. 


공감을 한자로 풀어보면 한 가지 공(共)에 느낄 감(感) 자이다. 한 가지로 느낀다는 것이다. 느낄 감(感)을 좀 더 파자해보면 咸(다 함) 자와 心(마음 심)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咸자는 ‘모두’나 ‘남김없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남김없이’라는 뜻을 가진 咸자에 心자를 결합한 感자는 ‘모조리 느끼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모조리 느끼다’라는 것은 오감(五感)을 통해 느낀다는 뜻이다.


오감을 통해 상대의 마음에 한 가지 마음으로 닿는 것이 공감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도 어렵고, 그것을 마음에 닿기도 어려우며 한 가지가 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공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감으로 먼저 느껴야 한다. 무엇을 느껴야 할까? 내 감정과 기분을 먼저 느껴야 한다. 내 감정을 오롯이 알아야 상대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흉내만 내는 것이다. 

감정의 다양함과 미묘한 차이를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감정이 원하는 바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 바로 부가 있고 성공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이의 공감능력을 어떻게 키워주어야 할까? 예술을 많이 접하고, 책을 읽히고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할까?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험하고 느낀 바가 많을수록 해석할 수 있는 범위가 많다. 그런데 이는 기초체력 대신 응용능력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공감의 기초체력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신생아를 보자. 아이들은 욕구에 명확하다. 말을 못 할 뿐이지, 배가 고프고, 졸리고, 기저귀가 축축하고 본인 나름의 표현으로 충분히 본인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한다.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모를 뿐이다. 조금 더 크면 주양육자와 상호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 아이들은 주양육자의 표정을 살피고 따라 한다. 엄마가 웃으면 웃고 엄마가 울면 운다. 애착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었으면 엄마의 상태를 살피기도 한다. 내 감정을 알고 상대의 감정을 살핀다. 어린아이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의 규율을 만나며 점차 잊혀 간다. 아이들은 아프면 운다. 아프면 화가 난다. 화가 나는 감정에 대한 솔직한 대응으로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것에 대고 부모들은 “울지 말고 예쁘게 말하라고 했지!”라고 윽박지른다. 아니. 슬픈데, 화나는데 예쁘게 말이 어떻게 나오느냐 말이다. 아이들은 헷갈린다. 내가 가진 감정이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잊어간다.


자신의 감정을 잊은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알기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감정을 잃은 사람들은 그 채워지지 않은 공감의 골을 찾아 부유한다. 




그리스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잊힌 것들)’이며 영어 educate(교육하다)의 어원은 ‘본래 내면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다’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진리는 잊힌 것들에 있으며, 교육이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꺼내는 것에 있다는 말이 수능이 없어지고 새로운 세대가 올 것이라는 현우진 선생님의 말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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