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페스트>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것 같네
코로나19 이후 가장 많이 언급된 문학작품은 아마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일 것이다. 아마 [SF, 그리고 뉴노멀]이라는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한 번쯤은 머리에 떠올렸으리라. 알 수 없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덮친 평화로운 휴양도시의 혼란을 그대로 담아낸 <페스트>는 코로나라는 이례적인 수준의 전염병의 상황 속에 놓인 우리의 모습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익숙한 서사를 보여준다.
사실 <페스트>를 SF소설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깝다. 코로나를 겪었기에 알고 있겠지만 페스트와 전염병이 세계를 덮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그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 또한 코로나 사태와 함께 우리가 마주했던 일련의 사태를 연상케한다. 그런데 이런 페스트를 SF적 관점으로 해석한 작품이 있다. 바로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노래들을 엮어낸 주크박스 창작뮤지컬 <페스트>다.
뮤지컬 <페스트>는 기본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서사를 따라간다. 오랑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인 페스트가 번지기 시작했고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시장은 시 전체를 봉쇄한다. 하지만 이러한 봉쇄정책은 오히려 반발만 가져올 뿐이고 전염병에는 전혀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사인 리유는 꿋꿋이 자신이 맡은 바를 해내고 이야기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기자 랑베르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모든 전염병을 이겨내는 것은 전염병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식물학자인 타루의 캐릭터와 오랑의 시장이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라거나, 여성 캐릭터가 된 타루와 리유 사이의 러브라인이 있다거나, 휴양도시 오랑이 멋진 신세계 속 애프터 포드 시대와 같은 미래도시라는 점 등 구체적인 서사 전개로 들어가자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만, 어쨌든 기본적인 서사와 메시지는 원작과 궤를 같이 한다. 아니, 같이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너무 별로였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연뮤덕 역사상 만났던 최악의 뮤지컬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 공연을 본 후 한동안(지금까지도) 창작 뮤지컬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로 작용할 만큼.
이렇다보니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없다. 미학적으로 논의하고 싶은 지점도 별로 없다. 하지만 ‘서태지의 음악’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서태지에게 헌정’하는 듯한 이 작품은 결국 서태지의 음악세계가 가진 한계만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서태지세대가 아니다. 서태지가 기존의 한국 대중음악세계를 뒤엎는 새로운 음악으로 등장한 후, ‘X세대’라 불리는 당대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난 알아요>, <하여가>, <컴백홈> 등 일렉트로닉 음악 장르가 대중음악시장의 주류가 되는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당시에 서태지는 엄청난 열광과 함께 한국대중음악사의 판도를 바꾼 ‘전설’이 되었다.
물론, 기존의 노래들을 엮어 뮤지컬을 만드는 ‘주크박스 뮤지컬’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기존 노래와 가수의 팬덤을 업고 흥행에는 성공할 지도 모르나, 작품성 면에서는 혹평을 받아 초연이 마지막 공연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영화화까지 이루어지며 전세계적인 흥행을 이뤄낸 뮤지컬 <맘마미아!> 또한 주크박스 뮤지컬계의 거의 유일한 메가 히트작으로 불릴 정도다.
이런 주크박스 뮤지컬은 서태지 음악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일련의 편곡 과정을 통해 뮤지컬이 된 서태지의 음악은 재앙과도 같았다. 과도하게 메시지와 강렬한 이미지에만 집중한 그의 음악은 명확한 기승전결을 만들어주지 못했고, 그의 랩은 가사전달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전달력의 문제는 래퍼가 아닌 뮤지컬배우들이 불렀다는 이유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뮤지컬에 적합한 장르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서태지의 음악 세계에는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점이 극명하게 느껴졌다. 오케스트레이션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 음악이 그 음악 같았던 그의 음악들은 공연의 전개를 단조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단조롭지만 너무나도 뚜렷한 소나무같은 음악적 색채는 외연확장을 이뤄내지 못하고 계속 그의 음악을 그의 것으로만 멈춰있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가왕’ 조용필이 기존의 음악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음악적 시도를 보여준 <Hello>와 <Bounce>를 통한 외연확장을 보여주며 다시 한 번 전성기를 이뤄낸 반면, 서태지는 기존의 음악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격동>으로 화려한 복귀를 시도했으나 과거의 영광에는 많이 못미치는 성과를 보여줬고 지금까지도 그의 활동 소식이 없다.
20년이 지난 후,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고도화되었고 아티스트들의 실력 또한 점점 향상되어왔다. 서태지의 음악이 가져다 준 만큼의 혁신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서태지가 보여준 음악이 지금까지도 유의미하지는 않다. 실제로, 동시대의 혹은 이전 시대의 다른 음악들이 드라마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이 리메이크 되었지만 서태지는 당시의 선풍적인 인기와 비교했을 때 리메이크가 활발하지 않다. 물론 그의 음악이 독보적인 영역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만들어낸 혁신의 시공간적 범위가 넓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문화대통령’ 서태지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그 모습에 고정되어 마니아층 사이에서 여전히 ‘대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더 넓은 대중음악의 세계에서 그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떠한 혁신과 변화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힘은 시간이 지난 후에 알 수 있다. 20년이 지난 후 뮤지컬을 통해 마주했던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음악들이 포스트-서태지 세대인 나에게 재앙과 같았던 것처럼, 코로나19라는 엄청난 변화가 어떤 힘을 가져올 지는 ‘포스트-코로나’ 세대에 이르러서야 정확히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높게 올려 쌓은 담 이 단절 속의 난
나의 꿈에 거짓을 고한 이후
그 향긋했던 약속의 이 도피처로 돌아온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는걸
알베르 카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페스트》는 서태지의 노래를 재창작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전염병으로 인해 폐쇄된 미래의 가상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한다. 오랑시는 모든 시민들의 행복을 통제한다는 명목하에, 모든 시민들의 기억을 시에서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이다. 이곳에서 어느날 의문의 전염병, '페스트'가 발병하고 전염병은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지기 시작한다. 페스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하는 오랑시의 시장 리샤르와 권력자들의 탄압에 저항하며, 의사 리유와 식물학자 타루, 기자 랑베르를 비롯한 오랑시의 시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삶을 통해 페스트와 맞서 싸운다. 전염병이 지나간 후 참담한 도시의 폐허에서 시민들은 절망 속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했던 사랑과 희생을 통해 한줄기의 희망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