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처음엔 희미하게
그리곤 점점 분명하게
차갑게 변해간 그 눈빛을 난 봤어.
너무나 행복했던 그녀는
점점 더 외로워져만 갔어.
보살피지 않은 화분처럼 시들어.
견고한 슬픔은 그녈 망가뜨렸어.
코호트(Cohort). 일반인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특히 조사방법론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특정한 시기 안에 함께 태어나 유사한 생애주기를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 실제로 사회과학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 세대 자체를 표본집단으로 활용해 조사하는 경우에 '코호트연구'를 진행한다. 사실 영어에서 코호트라는 말은 꽤나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세대라는 연결의 개념으로 등장하는 코호트와 달리, 우리가 코호트라는 단어에 익숙해진 것은 ‘단절’의 차원인 코호트격리를 통해서다. 2020년 코로나 사태 초기, 국내에서 대구/경북 지역의 신천지 교인들이 한 단지 내에서 집단적으로 감염이 되자 단지 전체를 외부로부터 격리하는 ‘코호트격리’를 시행했고, 코호트라는 말이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코호트격리란 '동일한 병원체에 노출되거나 감염을 가진 환자군(코호트)이 함께 배치되는 병실, 병동'을 말한다. 불이 났을 때, 건물 내부의 불이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자동으로 방화벽이 내려오듯, 해당 집단 혹은 공간 내에 병원균이 과도하게 퍼져있고 일일히 감염자를 분리해내는 것이 어려운 경우 코호트격리를 실시하게 된다.
코호트격리는 아마도 현대 의학에 발달 이후 가장 크게 마주한 전염병 사태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새로운 풍속도일 것이다.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강자는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약자를 특정한 구역 안에 고립시키고 약자의 공간을 박탈한다. 우리는 코호트격리의 당사자가 될 수도, 누군가를 코호트격리 시키는 자가 될 수도 있다. 과연 코호트격리는 앞으로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간들에 의해 '코호트 격리'를 당한 도우미 로봇들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보자.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인간과 똑같이 생긴 가사도우미 로봇들이 그 수명을 다하고 주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후 고장이 나 더이상 작동할 수 없는 바로 그 날까지 함께 모여사는 건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로봇 올리버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제임스와 이별한 후, 다시 제임스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클레어는 전 주인에게 버려진 후 그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
함께 모여 사는 '고물 로봇'들의 모습은 마치 코로나 확진자들의 코호트 격리와 같다. 코호트 격리를 시행하게 될 경우 해당 집단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로의 감염 확장을 막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큰 편익을 가져다준다는 판단 하에 그 곳에 격리되는 것이다. 낡은 로봇들 또한 더 이상 부품조차 생산되지 않아 언제 작동을 멈출지도 모르고, 자신들을 수리해줄 수 있는 사람들도 없는 공간에 모여 살며 자신이 고장나는 그 날에 점점 가까워진다. 로봇들이 그곳에 모여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들이 버린 고물 로봇들을 인간들은 눈 앞에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클레어와 올리버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아파트라는 이름의 폐기물처리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로봇들은 자신이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좌절감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흔치않게 주인을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을 가진 올리버에게 클레어는 그런 헛된 희망은 상처만 가져다줄 것이라며 낙담한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며 언제일지 모를 고장의 나날을 기다리는 삶은 얼마나 절망적일까.
코로나로 인한 코호트격리자들 또한 이러한 좌절감과 함께한다. 자신이 병원체가 되어 밖의 사람들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히는 생활이 이어진다. 코로나가 회복되어 외출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코로나 확진자' 혹은 '코호트 격리자'라는 낙인은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아파트 밖을 벗어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까지 긴 시간 동안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듯이, 코로나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에 대한 트라우마를 벗어나기 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코호트 격리를 당했지만, 점점 자발적 코호트 격리가 증가하고 있다. 얼마 전, 새롭게 지어질 어느 고급 신축 아파트 단지 내부에 영화관이 함께 지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코로나 이후 외부로 나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고급 아파트에는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하나씩 추가되며 외부와는 분리된 세계가 만들어지고 아파트 내부와 외부를 경계짓는 담장은 점점 견고해져만 간다.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 타인과 자신의 집단을 구분짓기 위한 열망은 증가했고, 코로나가 만들어낸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러한 열망을 극대화시켰고 현실화했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언택트라는 이름의 단절이 지속되며 격차가 심화되고 그 격차 속에서 약자들은 외면받는 사회가 아닐까. 2020년 12월, 송파구의 한 장애인 시설에 대해 보건당국은 코호트격리 조치를 내렸고 장애인 단체와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의 가족들은 반발했다. 물론 다수의 안전을 위한 조치일 수는 있다. 하지만 다수를 위한 코호트격리가 안전 이전에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에이미 추아는 자신의 저서인 <정치적 부족주의>를 통해 점점 세계화되고 연결이 늘어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만을 고수하는 집단적 이기주의인 부족주의가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와 같은 단절은 “소득 불평등이 심한 곳이라면 부유층은 그들만의 주거 단지를 형성하고, 개인적으로 교육, 의료, 교통, 치안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도록 만들고, “이런 경우 소득 계층 간의 적대감이나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것은 물론, 사회적 필수 서비스와 사회보장에 대한 공적 투자가 위축되고 일자리의 분절화도 심해”[1]진다.
거주의 공간을 분리하는 것은 계급화의 시작이다. 혹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후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20세기만의 개념인 듯하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계층화가 시작되었고 계층 간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는 다시 계층별로 '코호트격리'되며 계급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단절과 계급화의 미래는 우리 앞에 다가왔다. 정확히는 이미 계급화가 다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오늘날의 계급화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 최소한 우리는 모두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경험적 지식과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사람은 똑같이 고귀하며 소중하다는 천부인권의 개념과 계층 간 활발한 이동의 경험, 소통과 연결의 감각을 통해 서로의 연결되고 다시 한번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연결을 위한 노력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계급화는 멈추지 않는다. 단절과 격리가 만들어내는 계급화를 이겨내기 위한 연결과 소통의 연습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이 연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공동체에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의지는 우리를 계속해서 연결해줄 것이다. 지금의 격리가 영원한 단절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이 계속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로가 되기 힘든 세상에서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는 이야기를, 그래서 함께 나누고 싶”[2]었다는 작가와 작곡가의 말처럼.
올리버와 클레어는 인간들의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격리의 삶을 선택했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제임스에 대한 믿음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그들은 트라으마를 딛고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다면자 신과 다른 집단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낙인이 가져다 주는 공포를 딛고 우리 모두가 함께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 잡은 손 자꾸만 낡아가고
시간과 함께 모두 저물어 간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거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천휴와 윌 애런슨이 작사/작곡한 한국의 창작 뮤지컬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으며 미국의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 대극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브로드웨이와 달리 중소형 극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뉴욕의 ‘대학로’와 같은 극장가)로 진출하며 화제를 모았다. 자극적인 소재들만으로 가득했던 한국 창작뮤지컬계에서 감성적인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매 회차 피아노 4중주로 연주되는 음악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인간과 똑같이 생긴 ‘헬퍼봇’이라는 미래 지향적 소재를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풀어내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올리버와 클레어의 사랑과 우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사랑과 감동의 메시지를 던진다. 올리버와 클레어의 통통튀는 귀여움이 가장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1] 조효진, 2018, “죽도록 일하다가 정말 죽는다”; 시민건강연구소,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낮은산. p.21.
[2] 박천휴·윌 애런슨, 2020, “AUTHOR’S NOTE”, 「어쩌면 해피엔딩 프로그램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