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생존과 번식, 기생에 특화된 식물이지요.
마치 더스트 폴 시대의 정신을 집약해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악착같이 살아남고, 죽은 것들을 양분 삼아 자라나고,
한번 머물렀던 땅은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한 자리에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멀리 뻗어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인...
어떻게 보면 그 자체로 더스트를 닮은 식물이에요.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나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처럼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잘 어우러지고 친해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은 오랜 진리와도 같다. 굳이 이런 옛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성향이 비슷한 사람과 인간관계를 쌓기가 쉽다는 것을 학습해왔다.
반면에, 우리는 자신과 가장 비슷한 동족에게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유전적으로 보았을 때, 혈통이 같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서 유전병의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유전병의 확률을 낮추기 위해 인류는 자신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친족 혹은 동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론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동족혐오를 하게 되는 것이 단지 유전학적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숨기고 싶은 내면과 결함을 가진,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가장 큰 혐오감을 느낀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프로이트와 융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가진 가장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고, 그 내면의 특징을 가진 사람에게서 혐오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구체적인 이유 없이, 그냥 어떤 사람이 유난히 미울 때,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어두운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그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싫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타인에게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분노한다.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화나게 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즉, 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혐오는 나의 결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어떠한 대상이나 집단을 향한 우리 사회의 혐오는 사회의 시스템 혹은 구성원이 가진 가장 어두운 면을 조망한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재난은 인간에게 공포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미국의 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에 따르면, '사람들이 집단을 만들어 타자를 대상화'하며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 또한 '패배에 대한 일조의 비이성적 두려움'에서 기인한다[1]. 코로나라는 재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코로나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공포가 혐오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코로나로 인한 피로감과 우울감,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내는 분노에 이르기까지. 작은 것들에도 민감해지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점점 커져만 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코로나를 향해 느끼고 있는 이 공포와 혐오감도 어쩌면 우리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재난은 과연 인류가 가진 어떤 결함을 조망하고 있을까? 거대한 재난 이후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을 통해 재난과 인간의 관계를 조망하는 김초엽 작가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 이 질문들의 답에 다가가 보려 한다.
『지구 끝의 온실』은 2055년부터 2070년까지 지구 전체가 먼지로 뒤덮여 인류가 삶의 터전을 잃었던 더스트 폴 이후 새롭게 재건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식물학자인 아영은 연구를 진행하던 도중, 자신이 진행하던 연구와 관련한 제보를 받고 아디스아바바의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더스트 시대의 생존자였고, 더스트 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해독제를 만든 영웅이었지만 재건 이후 과학자들에 의해 ‘위험한 식물로 약을 만들어 배포했던 마녀’라는 오명을 쓰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영에게 더스트 폴 시대에 자신들이 겪었던 이야기를 전해준다.
더스트가 세상을 덮치자, 산업화 시대의 인클로저 운동을 연상시키듯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스트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돔’을 만들고 그 안에 피신했다. 돔 밖의 사람들의 안전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돔 밖의 사람들은 더스트로 인해 생명을 잃었고, 그나마 더스트를 이겨낼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이른바 ‘내성종’들은 돔 안의 사람들에게 피를 뽑히는 등 생물학적으로 착취를 당한 채 버려졌다. 나오미와 아마라 또한 내성종이었고 이들은 착취와 도망의 삶을 반복하던 중, 돔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모인 ‘프림 빌리지’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더스트 폴의 피해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돔 안에 속한 군인들은 돔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죽이기 위해 인간이 만든 인간형 로봇을 활용했고, 더스트 시대의 희생은 더욱 늘어만 갔다. 게다가 더스트 폴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또한 진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인간들이 초래한 결과였다. 다른 생물들은 놀라운 진화의 힘을 보여주며 더스트 시대에도 살아남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인간들은 ‘결과를 알면서도 멸망으로 떠밀려갔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돔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만들어낸 ‘프림 빌리지’와 같은 공동체가 연대의 힘을 발휘하자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깨닫게 해준다는 임무를 마치기라도 한 듯 사라지며 지구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인류는 재난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재난에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설령 재난이 인류의 행동과 무관하게 찾아왔을 지라도, 그 피해를 극대화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으로 인한 것이다. 팬데믹의 폭풍을 거친 우리는 알고 있다. 팬데믹이 단순히 한 사람, 혹은 어느 한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 일정 부분의 책임을 안고 있고, 우리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며 누렸던 것들이 팬데믹의 파급력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우리 사회에 내재된 불균형과 결함은 재난을 통해 극대화되고 인류는 재난의 원인제공자로써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세상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인류는 그 원인을 어떤 한 사람, 집단에게 전가하기 바빴다. 전파 초기, 국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고, 중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서구의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며 혐오를 서슴치 않았다. 중국인을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혐오감을 내비쳤던 한국인들도 결국엔 또 다른 집단에게 혐오의 대상에 포함되는 연쇄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혐오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전염병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본질과는 멀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태원 클럽발 집단 감염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도 미디어에서는 그 클럽이 성소수자들의 ‘게이 클럽’임을 강조하였고 성소수자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는 극에 달했다. 대중들의 혐오에 공포를 느낀 성소수자들은 검사를 받는 것을 기피하였고, 코로나가 확산되는 또 하나의 기점이 되었다. 어쩌면 간단하게 끝났을지 모르는 문제들에 혐오가 더해져 더욱 극단화된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문제의 원인으로 어느 집단이나 대상을 지목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된다. 계속해서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로 문제를 떠넘기며 그 더 이상 책임을 전가할 곳이 없는 밑바닥으로 문제를 떠넘긴다. 자신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로.
모든 문제는 그 원인을 찾아야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본질 위에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본질에서 멀어져만 간다. 그 원인은 절대 멀리에 있지 않다. 우리 안에서 찾으면 된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지만 우리의 안에 존재하는, 재난이 고통스럽게 직면하도록 만들어준 인류의 어두운 결함 속에서.
이탈리아의 페미니즘 철학자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중세 유럽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을 다룬 자신의 저서 『캘리번과 마녀(Calivan and the Witch)』를 통해 ‘생산양식이 대체되는 시기에는 악마신앙이 등장’하며 중세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기에 자본주의의의 구조적 재조직화와 페스트의 혼란이 만나 마녀사냥이라는 광기의 역사가 벌어졌다고 서술한다. 전염병과 산업구조 재편이 만나 광기의 시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이른바 ‘뉴노멀’을 마주할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큰 산업의 변화 속에 놓여있고,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의 확대는 이러한 기술과 산업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페데리치가 말한 ‘마녀사냥’이 이루어지는 환경적 조건과 유사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마주하게 될 비이성과 광기의 마녀사냥은 무엇일까? 중세의 마녀사냥은 민간요법에 능통한 여성이나 잔다르크와 같이 당시의 남성 중심적 사회 질서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을 희생시켰다. 코로나와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낼 ‘뉴노멀’의 칼날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경계해야 한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는 자신들이 더스트 시대에 배우고 깨달았던 바를 통해 수많은 이들을 구원하고자 했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더스트 폴을 이겨낸 세상은 그들의 감사함은 잊은 채 그들이 더스트 시대에 행했던 민간요법을 ‘위험한 기술’로 치부해버렸다. 외세의 침략을 이겨냈음에도 당시의 남성 중심적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했던 잔다르크처럼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혼란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어낼 곳을 찾게 되고, 그 대상은 가장 도드라진 인물, 가장 앞서나가는 인물을 향하기 쉽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에서 맨 앞에 선 사람은 언제나 쉽게 희생양이자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가장 앞서가는 과학자이자 혁신가였던 나오미와 아마라도 너무도 쉽게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혹자는 중세 유럽의 사람들보다 우리가 훨씬 더 이성적으로 깨어있고, 마녀사냥과 같은 광기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믿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들보다 깨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우리 사회에는 마녀사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이미 산업화라는 엄청난 산업구조의 재편 속에서 ‘반공’이라는 이름 하에 일어났던 엄청난 독재와 민주주의 탄압을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를 겪으면서도 외국인 노동자부터 성소수자에 이르기까지 소수자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중세의 유럽이 그러했듯 우리도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는 순간 마녀사냥과 같은 광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스트 시대의 영웅인 자매가 마녀가 되는 것이 한순간이었듯, 비이성의 광기가 시작되는 순간 제어할 수 없는 마녀사냥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곧바로 혐오의 온상이 된다.
『지구 끝의 온실』 속 사람들은 미래에서 더스트폴을 이겨내고 세상을 재건할 수 있었던 힘이 과학자들의 노력 덕분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영이 발견한 진실은 달랐다. 레이첼과 지수의 사랑과 동지애로 만들어진 모스바나와 그 모스바나로 만든 해독제로 사람들을 구한 나오미와 아마라의 노력,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먼지에 강한 모스바나를 전파시켜 세상의 먼지를 정화시켰던 프림 빌리지 사람들이 세상을 재건한 것이다. 모든 과학자들이 ‘위험한 풀’이라며 나오미와 아마라를 공격했던 바로 그 모스바나로, 더스트 폴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프림 빌리지의 사람들이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할 지라도 그 힘이 연대하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소수자를 향한 무차별적 혐오의 광기를 이겨내기 위해 우리에겐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이전과는 다른,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그런 연대와 믿음, 그리고 사랑의 힘이. 소외받고 차별당한 모든 이를 끌어안고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다면, 어떤 강력한 마녀사냥의 칼날도 그 연대의 힘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더스트폴은 온 지구를 먼지로 뒤덮어버리며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그 속에서 돔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들만이 살아남았고, 돔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먼지 속에서 그대로 사라지거나 힘겹게 살아남았다. 더스트폴의 재난 자체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가온 이후의 세상은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더스트폴은 너무도 정확하게 세상의 가장 취약한 곳과 소외당한 이들을 찾아냈고 인간 사회가 버린 그들부터 공격해갔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인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도착한 이상, 더스트폴은 인간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학습하며 세상을 공격한다. 같은 인간들조차 포용해주지 않는 이들을 다른 존재가 보듬어 줄 리 만무하고, 그들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코로나를 키운 것은 결국 인간이다. 바이러스가 엄청난 파급력과 함께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인류가 엄청난 속도경쟁과 이동성경쟁으로 만들어낸 촘촘한 연결망을 통해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세계를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가 너무나도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마을(지구촌)’이 되어버린 21세기에 한 나라에서 생긴 전염병이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인간의 이동이 없으면 전염병의 파급력은 쉽게 사그라든다. 하지만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의 기술혁명을 통해 장거리 이동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SAS와 MERS 등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고, 코로나19 또한 여러 가지의 변이들을 만들어냈던 것 또한 의학기술의 발달을 극복하고 바이러스가 진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렇게 인간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닮았다. 인류는 바이러스를 통해 마주한 자신들의 어두운 내면에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의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멈춘 이 세계에서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처와 고통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밝은 세상만을 바라보며 장밋빛 미래에 취해있던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바로 이런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을.
전염병은 인간을 닮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혼란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인간이 가장 억압하고 배제하는 소수자는 전염병 속에서도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된다. 사회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기울인다면, 그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포용하고 함께 연대한다면 전염병의 공격에서도 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 코로나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몇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균열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았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우리의 세계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희생 위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대가가 헛되이 쓰이지 않으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의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설령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지금까지 외면했던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고 그것이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변화하고 변화해야 한다. 인간의 모습을 닮은 재난이 더 이상 우리를 위태롭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변해야 한다. 우리가 변하면 재난도 변한다. 잊지 말자. 재난은 언제나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내면과 취약한 곳을 향한다는 사실을.
그와 동시에, 지수는 축복받은 숲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그건 프림 빌리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마을의 삶조차 다른 멸망의 잔여물 위에 세워진 것이었고,
숲 바깥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의 삶 역시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었다.
밖으로부터의 위협은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왔다.
김초엽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은 모든 지구가 먼지로 뒤덮이는 더스트 폴이라는 가상의 재난을 겪는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더스트 폴 이후의 재건된 시대에서 식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번식하는 의문의 잡초를 연구하던 식물학자 아영이 자신의 연구의 실마리를 찾던 중, 어린 시절 은퇴한 로봇 과학자의 정원에서 마주했던 파란 빛을 기억해낸다. 이 빛의 정체를 찾아가던 중 더스트 폴 시대의 생존자인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로부터 당시 시대의 증언을 듣게 되고 더스트 폴 시대와 그것의 극복 과정에서 숨겨져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전 세계가 더스트 폴을 이겨낸 과학 기술에 경이로움을 표했지만, 결국 더스트폴에서 세상을 구한 것은 그 기술이 전 세계로 퍼질 수 있게 만든 연대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영은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1] 마사 누스바움(조계원 역), 2015, 『혐오와 수치심』, p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