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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종관 Aug 28. 2024

빛 둘

   날이 밝으면 적외선이 물러가고 말끔한 햇빛이 마당을 비췄다. 마당은 눈부신 금빛으로 반짝인다. 집은 한순간에 생기를 되찾는다. 어머니가 놓고 들어간 콩깍지를 부지런한 햇빛이 이리저리 뒤적이며 건조시킨다. 콩꼬투리 끝부분이 두 쪽으로 벌어지며 콩알이 쏟아진다. 어머니는 마당에 떨어진 콩알 하나라도 주울 것이다. 모서리가 깨진 사기종지에 모아 놓은 콩알들이 툇마루에서 봄이 올 때까지 잠을 잘 것이다. 내년이 되면 콩알들은 울타리 아래 심어져 싹을 틔울 것이다. 집이 완성되고 마당이 깨끗해졌을 때 울타리 아래에는 암탉이 살았다. 닭은 언제나 병아리들을 끌고 다녔는데 노란 병아리가 귀여워서 만지려고 하면 뒤뚱거리며 달려와 손등을 쪼았다. 울타리는 가시 많은 꽃나무였고 철마다 다른 꽃을 피워서 높은 울타리가 늘 꽃동산이었다. 어머니는 울타리에서 딴 빨간 열매를 처마 밑에 새끼줄을 걸어 매달아 놓았다. 그것들은 배가 아플 때 약에 쓸 거라고 했다. 집은 늘 평안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았는데도 집은 넘치는 온기로 태평했다. 아이들은 가까운 학교에 다녔다. 카메라의 기억에 특별한 즐거움으로 남은 것은 운동회 날이었다. 색색의 종이 깃발이 흩날리는 운동회 날에 아이들은 새끼 새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점심시간에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삶은 밤을 까먹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나면 구석에 밤껍질이 수북하게 쌓였다. 부지런한 소사 아저씨가 커다란 대 빗자루로 밤껍질을 울타리 밖으로 쓸어 냈다. 학교 울타리에 심어 놓은 노간주나무는 밤껍질 거름을 먹고 잘도 자랐다. 누나들은 공부를 잘했다. 높은 연단에 상을 받으러 올라가는 누나들의 이름을 가끔 들었다. 누나들이 상을 타 가지고 오면 아버지는 하얗고 두꺼운 종이 상장을 큰 소리로 읽었다. 카메라는 동그란 렌즈가 고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집 안에 우렁우렁 울린다. 어머니는 뜨거운 시래기된장국을 밥상에 올려놓는다. 화로에서 고등어 익어 가는 냄새가 방 안에 퍼진다.      


   즐거운 날들은 금방 가고 집은 시나브로 늙어 간다. 누나들이 자라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형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집안일은 한결같고 아버지는 점점 말이 없어진다. 마을은 여전히 평온하지만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사라진다. 아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등 굽은 노인들이 정자에 둘러앉아 한탄을 늘어놓는다. 개울 건너 학교가 문을 닫는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에 잡초가 들어찬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는 소를 풀어놓으면 잘 뜯어 먹을 것 같다. 아버지의 경운기가 연기를 뿜으며 들판을 달린다. 요란한 엔진소리가 포효하는 듯하지만 낡은 바퀴는 작은 경사에도 힘을 내지 못한다. 기계는 녹슬고 농부는 힘이 부친다. 개울물이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한다. 한겨울 버드나무 가지에 맺힌 물방울이 달밤에 수정처럼 빛난다. 늦은 밤에 한 사람이 다리께에서 서성인다. 그는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마을 쪽으로 갈수록 걸음이 느려진다. 마을이 시작되는 고샅길에 이르러서 느린 걸음을 멈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라이터 불빛에 얼굴이 잠깐 비친다. 거리가 멀어서 카메라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마을을 잘 아는 듯하다. 개가 짖는다. 개는 그 사람이 마을로 접어들수록 점점 큰 소리로 짖는다. 마을로 들어오지 말고 돌아가라는 듯이 맹렬하게 짖는다. 한 집을 향해 가던 그의 걸음이 멈춘다.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이지 않던 그는 담배를 튕겨버리고 돌아선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는 어깨가 올 때보다 더 무거워 보인다. 개 짖는 소리가 잦아든다. 카메라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잠자리에 든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고 싶지만 그가 대문 앞에 서 있던 집이 근심에 잠겨 있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멀리서 보면 집은 호롱불 같은 가로등 불빛 아래 동그마니 앉아 있다. 잎이 다 떨어진 가시덩굴 울타리가 엉성하게 집을 보듬고 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들썩이던 지붕은 한겨울 된서리를 맞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어머니는 온종일 매달린 밭일에 힘겨웠는지 얕은 신음을 내며 누워 있다. 잠에 들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잠깐 졸다가 깨어나니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길가를 서성인 것 같은데 오밤중에 찾아올 사람이 없기에 내다보려는 것을 그만두고 아픈 허리를 움직여 돌아눕는다. 한동안 연락이 없는 큰아들 소식이 궁금하다. 얼마 전 이혼 얘기가 나왔다. 그 생각을 하면 명치를 발로 차인 것처럼 아프다. 며느리는 인정 없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고초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손주들은 아직 어리다. 그것들의 장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들이 어서 심이 펴서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서지를 못한다. 사업한다고 애쓰지 말고 어디 취직이라도 하면 낫지 않을까. 자동차 운전은 하니 마을버스 기사라도 하면 좋을 듯싶다. 큰돈은 못 벌어도 밥은 먹고살지 않겠는가. 이혼을 한다면 손주들은 어머니 차지다. 그것은 괴롭고 슬픈 일이다. 동네 망신스럽고 늙은 몸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다. 어머니 한숨 소리가 굴뚝을 빠져나와 꽁꽁 언 하늘에 연기처럼 흩어진다. 비탈밭에 거름을 뿌리고 온 아버지는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버지 코 고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카메라는 짐작뿐인 말들을 기억에서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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