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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아저씨 Jun 28. 2020

나를 광고해야 하는 이유

그들은 나의 존재를 모른다.

집안 대청소를 하며 거의 5년 이상 못 찾고 있던 중요한 물건이 나왔다..

'필요할 때는 안보이더니만..' 하는 원망 섞인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 '과연 이렇게 아쉽고 중요한 물건이 왜 이제야 보일까?'라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드는 생각은 '그럼 만약에 계속 저 구석에 처박혀만 있었다면, 저 물건이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찾을 수 없다면 가치도 없다.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때에 사용할 수 없다면 그저 아주 비싼 골동품일 뿐이다. 과연 그 능력과 잠재력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리고 검증받을 수 있을까?


"내겐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지? 내게 딱 맞는 직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한 번쯤 스스로에게 툴툴대며 이런 핀잔 섞인 질문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나를 찾으려는 곳도 잘 모르겠고,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딜까?.


그러나 본인이 잘 모르는 내 능력을 다른 사람이 찾아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낫다.


그리고 참 재미있는 모순 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나는 잠재력이 뛰어난 인재인데'  '그것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을 뿐’ 그런데 그 기회를 얻으려면 '이미 검증된 자신’이 필요하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마치 대학을 갓 졸업한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은 모두 경력직만 채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모순의 굴레는 나의 잠재력을 그저 잠만 자고 있는 녀석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군가 찾아주지 않는다면, 저 안에 누워계신 분도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크게 지었으니 못 찾을 리는 없을 테지만.
능력은 실패라는 잡초를 먹고 자란다


실패라는 잡초를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내 주변은 잡초 투성이의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반대로 실패의 두려움을 한 번씩 이겨 나간다면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마치 교과서에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걸 안다.


물론 실패와 실수는 다르다. 실패란 도전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개선해 나아가는 것이고, 실수란 지난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즉, 바뀌는 것이 없다면 당신은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실패를 독려하는 글 같지만 실패란 본인이 감내할 용기가 있을 때 도전하는 것이다. 자칫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성공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모습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나만의 TooL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실수가 될지 실패가 될지 구분하는 방법

1.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다른 것인가?

2. 충분히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때론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3.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결과가 예측되는가?

(뻔한 결과가 예측된다면, 실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결정인가?


위의 질문에서 3번은 'No'가 나오고 나머진 'Yes'가 나온다면 거의 정확히 옳은 결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해 후회한다.



어학연수를 위해 만점짜리 토익 성적표는 필요하지 않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인생에 있어 완벽한 준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준비된 채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리고 난 아직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 


물론 준비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언제까지 준비를 위한 준비만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내 마음속 결정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준비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거나 머물러 있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은 완벽한 모습을 요구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완벽한 상태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지 않다고 주눅 들 필요도 없다. 정작 주변에서 당신에게 평가만 늘어놓는 이들은 시작할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용기란 공짜로 생기지 않는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팁을 하나 알려주겠다.


만약 당신이 장시간 비행기로 여행을 해야 한다면, 비행기에 탑승후 승무원에게 이 비행기에 비치된 서적 리스트를 달라고 요구해보라. 항공사마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장시간의 비행이 지루하지 않도록 항공사에서는 기내에 서적을 비치해 두곤 한다. 


나도 사업이란 걸 막 시작했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가 많이 부족했었다. 마침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독서 리스트를 발견하고는 책 한 권을 읽게 된다. 


세 시간 남짓 짧은 비행에 어울리는 가벼운 책이었다.

제목은 '그래도 계속 가라(Joseph M. Marshall III의 Keep Going)'였다.

책에는 이솝우화처럼 짤막한 이야기를 해주는 인디언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제목을 보고 문뜩 든 생각은 '응? 도대체 뭘 계속 가라는 것이지?' 조금은 엉뚱해 보였다.


책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용기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너무나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용기엔 공식이 있으며 그 공식이 성립해야 용기라는 결과물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럼 그 공식은 무엇일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론 다음과 같았다. 


용기란? = 노력(땀) + 고통(피)


위 공식을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일단 용기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입장권 티켓(기회)이 될 수 있다. 오락실에서 500원짜리 동전처럼 그리고 그것을 얻게 된다면 인생에서 새로운 게임에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노력은 내가 땀 흘리며 시간을 투자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운동선수에겐 훈련이 직장인에겐 매일 일하는 것이 그리고 학생에겐 공부와 같은 것들이 될 수 있겠다. 


고통은 내가 처한 상황에 비유할 수 있겠다. 또는 희생? 정도로 표현이 가능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다른 고민과 상황들이 있겠지만 모두 상대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자신만의 상황이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는 행위 바로 고통을 감내해 내는 것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겐 배고픈 시간들을 참아내는 것, 병에 걸린 사람에겐 그 병이 주는 고통과 함께하면서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것, 자식을 키우는 부모에겐 어린 자식들이 크는 것을 기다려주는 것들 말이다. 군에 복무하는 친구들에겐 군대에 있는 시간 그 자체가 되겠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나는 무지무지 힘들게 살아가는데 왜 용기라는 게 안 생기나?' 직장을 그만둘 용기도, 어디론가 휙 떠날 용기도 말이다.


그럼 여기서 2가지 용기가 생기지 않는 예를 들어 보겠다. 한번 찬찬히 보고 위의 공식과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면 그 공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첫 번째 고통은 있는데 노력이 없어서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경우 :

"나는 집도 없이 매일 노숙을 하는 춥고 배고프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게 힘들지만, 소주 한잔에 의지하며 버텨나간다. " 이 사람에겐 고통이라는 점수는 매우 높지만, 노력이라는 점수가 낮기 때문에 용기라는 티켓은 생기지 않는다. 


두 번째 노력은 있는데 고통이 없어서 용기가 생기지 않는 경우:

"나는 재벌집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엄한 가정에서 교육받고 5살 때부터 지금 22살까지 매일 8시간 이상 책을 읽거나 선생님들과 공부를 게을리해본 적이 없다. 심지나 나 스스로도 미친 듯이 노력했다." 노력이라는 점수는 너무나 높지만, 환경이라는 탓에 의해 본인 고통이라는 점수가 낮을 수밖에 없다. 


위의 두 가지 케이스 모두 용기라는 티켓을 얻기란 쉽지 않다.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그 용기라는 것을 찾기 위한 도구로써 '여행'이라는 것을 사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도구가 해답이 될 순 없기에 어떤 누구에겐 '책'이 정답이 될 수 있고, 어떤 이에겐 '돈' 또는 '친구'가 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내 인생의 무대는 누가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인의 낮춰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고 나서서 일하다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모든 질책을 다 뒤집어쓰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험한 생각의 방식은 매번 스스로를 낮춰서 말하고, 사실은 더 잘할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잘못되어 쏟아지는 눈총과 비난이 두려워 항상 안전한 범위 내에서만 나의 능력을 펼치는 자세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표현방법과 사고는 본인의 능력을 예상 가능한 수준에 가둬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새로운 도전이나 위험을 감수할만한 기회를 스스로 박차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조금 부족할 때에는 가감 없이 결과를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바람직하게 나를 대면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와의 대화를 통해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me 라는 브랜드 그리고 나


지금까지 많은 내용을 서술했지만, 결국 본질은 나를 세상에 알리고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주느냐가 그것 자체가 내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브랜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사용하는 예시 중 하나는 독일 차이다. 

여러분은 독일차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벤츠, BMW, 아우디, 포르셰 등 독일차 혹은 독일 제품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차량' 혹은 '튼튼한 차량' 등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2차 대전 당시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한 무기들을 개발하고, 현재에도 공학적으로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기업들을 보면 독일 회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들 중에서는 독일차들의 그러한 이미지를 가질만한 어떠한 전문적인 자료나 지식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브랜딩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고,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면 나도 자신도 스스로의 브랜드를 구성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들을 속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숨기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은 자신이 없더라도 당당하게 나의 색을 표현한다면 오히려 나 자신도 그것을 위해 더 노력하게 될 것이다. 부족해서 남들에게 부끄러운 것은 잠시지만, 순간의 안도로 본인을 만족시키는 것은 영원히 나를 주저앉게 만들 수도 있다. 

반 고흐 그의 인간관계도 참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결코 혼자서만은 살 수 없을뿐더러, 끝없는 교류와 소통 속에서 성장한다. 

수천 수백만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만 살고 있다고 내가 그 무리 속에서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의 방식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 소통 속에서 나를 광고하는 것이야 말로 본인의 정체성을 알리고 인정받는 방법이며, 나와 당신이라는 관계를 연결하는 수단이다. 고대의 수십 명 단위의 사회에서부터 지금은 수천만 수억 명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거대 사회에서 나를 알리지 못하는 것은 소중한 진주가 주인을 찾지 못하고 서랍 속에서 외롭게 방치된 것과 같다.


만약 지금 당신을 알리고 싶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는 이렇게 조언해 주고 싶다. 


'지금 환경 말고 조금은 다른 환경으로 나를 이동시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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