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긴 한숨과 함께 코드를 지웠다. 모니터엔 깜빡이는 커서만 남았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5번째야."
하진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가요?"
"오늘 네가 코드를 전부 지운 게. 5번째라고."
사무실엔 서준과 하진, 그리고 늦게까지 남아있는 두어 명의 개발자들뿐이었다. 한때 열 명이 넘었던 개발팀은 이제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박대표님 제안... 정말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서준이 의자를 돌려 하진을 바라봤다. 수석 졸업, 대기업 최연소 TF장... 그의 이력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일부러 실패를 선택하려 하고 있었다.
"You know what? 실리콘밸리에서는 말이야..."
하진이 말을 시작하려는데 서준이 손을 들었다.
"누나, 제발 실리콘밸리 얘기는 그만..."
"알았어, 알았어."
하진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한 가지만 말하자면... 거기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더 무서워해. 실패할 용기조차 없는 사람은 결코 혁신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믿거든."
그때 서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김유진.
"유진씨."
"대표님... 아직 사무실이시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
"제가... 지금 사무실 앞인데요.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5분 후, 사무실 근처 편의점. 서준과 유진이 마주 앉았다.
"박대표님한테 들었어요. 2주 안에 출시하신다고."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된 건..."
"진짜 그러실 거예요?"
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사실은요. 사직서를 낸 게 후회돼요."
서준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Perfect에 합류했을 때의 그 설렘이 아직도 생생해요. 대표님이 보여주신 비전,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혁신적인 교육 플랫폼... 그때의 열정이 거짓일 리가 없다고 믿어요."
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다만... 그 완벽함을 향한 집착이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었어요. 매일 밤 새로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거든요."
"미안해요."
서준의 작은 사과가 편의점의 적막을 깼다.
"내가... 너무 완고했죠."
"아뇨, 대표님. 그건 장점이에요. 다만 그 장점이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아셨으면 해서요."
유진이 조심스레 미소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 정말 2주 안에 출시하신다면, 저도 다시..."
다음날 아침, Perfect 사무실. 회의실 화이트보드 앞에 팀원들이 모였다.
"2주. 우리가 가진 시간은 이게 전부야."
하진이 마카펜으로 숫자 14를 크게 썼다.
"불가능해 보일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개발한 것들 중에서 핵심 기능만 추려서 출시하려고 해."
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어제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AI 기반 학습 분석은 다음 버전으로 미루고, 기본적인 문제 은행과 학습 관리 기능만 넣자. 대신..."
서준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대신 사용자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을 전면에 배치해. 우리가 놓친 것들, 필요한 것들... 모두 사용자들이 알려줄 거야."
회의실 한켠에서 박민우가 미소 짓고 있었다.
"질문 있어요."
한 개발자가 손을 들었다.
"2주면... 테스트는 어떻게 하죠?"
"베타테스터를 모집할 거야."
이번엔 유진이 대답했다.
"제가 개발자 커뮤니티랑 교사 커뮤니티에 홍보하면 돼요.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분명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실 거예요."
서준은 문득 웃음이 났다.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다.
"다들... 고마워요."
"갑자기요?"
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냥... 우리가 함께 불완전해서 고마워요."
박민우가 일어나 박수를 쳤다.
"자, 이제 진짜 시작이군요. 실패할 준비 됐습니까, 강대표님?"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제는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그의 인생 처음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 이제... 완벽하게 실패할 준비가 됐습니다."
창 밖으로 아침 햇살이 비춰들었다. 13일 후면 Perfect의 베타 버전이 세상에 공개된다. 그것은 분명 불완전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불완전함 속에서, 진정한 완벽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