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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Sep 09. 2022

6. 단 한 명의 독자, '나'를 위한 글쓰기

감정 일기로 내면의 나와 친해지기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끝없는 감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매일 유튜브와 블로그, 그리고 도서관에서 우울증에 대해 공부했다. 병의 원인과 증상 , 극복하는 방법은 정말 다양했다. 그런데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조언에 포함되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 자신의 감정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수용해라는 내용이었다.


막상 감정을 들여다보고자 하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만 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회 분위기에서, 감정이란 항상 이성의 힘에 억눌러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혼란해하는 와중에 쉽고도 강력한 해결책을 발견했다. 바로 감정 일기를 쓰는 것이다. 일기장 앞에서 떠오르는 감정에 대해 어떠한 평가 없이 그대로 종이로 쓰는 글. 그야말로 '나'라는 한 명의 독자만을 위해 갈겨쓰는 글이다. 설득력을 가질 필요도, 유려한 문체를 가질 필요도 없다. 단지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감정일기를 처음 적어보기로 마음먹은 날,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펜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는 제법 익숙했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받았고, 지금은 폐쇄하였지만 10대 시절에 블로그를 운영해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나의 마음을 적어보려고 하니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몇 분이 지났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때 마침내 깨달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독자로 삼아 글을 써 본 적이 없었음을 말이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썼던 일기에는 담임선생님이라는 독자를 항상 의식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나서부터는, 별일 없는 하루가 지나면 아예 신문기사 중에 재미있는 내용을 쓰고 이에 대해서 생각을 적는 식으로 일기를 해치웠다. 자연스럽게 좋은 문장을 보고 주장과 근거를 정리할 수 있었기에 논리적인 글쓰기를 배우기에는 정말 좋았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일기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기회는 그만큼 사라져 갔다.


중고생 때는 싸이월드 유행을 따라 종종 미니홈피에 감성적인 글을 올리곤 했다. 그렇지만 감성글의 독자는 글을 볼 수 있는 일촌들이었다. 역시 나를 위한 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어서, 싸이월드보다도 개방적이었던 페이스북 시대가 도래했고, 실친이 아닌 페친들에게 맞춘 글을 쓰는 것은 이전보다도 더 타인을 의식하는 행동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보이는 나'에 초점을 맞춘 SNS인 인스타그램에서는 진정한 나는 없는 샘이었다.. 결국 지금까지 써 내려간 글 중 스스로를 위한 글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라는 독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자세를 고쳐 앉고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들을 갈겨내었다. 정신없이 적어낸 뒤,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와서 적은 내용을 살펴보았다.  내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한탄, 마음의 병을 악화시킨 원인들에 대한 원망,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적혀있었다.  


힘들게 '나'를 독자로 하는 첫 번째 글을 썼다. 한 번의 경험으로는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의 마음이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안갯속에 있던 스스로의 모습을 서서히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는 1주일에 3~4일 정도 꾸준하게 일기를 썼다. 아침 일찍, 이왕이면 일어나자마자 쓰는 게 진짜 나의 마음을 파악하기에 좋다는 영상을 보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글을 어느 정도 모으고 일기장을 돌아보니 반복되는 내용들이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게 되었다.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했던 분량은 언제부턴가 두세 페이지를 꼬박 채우게 되었다. 점점 내면의 나와 대화하는 기술이 늘어난 것이다.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5시만 되면 눈이 떠지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감정일기를 쓰는 습관을 가진 후부터, 이 시간을 '나'라는 작가와 '나'라는 독자와의 만남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울증이 준 새롭고도 신비한 체험. 세상에 떠밀려 살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찾아가고 있다.


감정일기를 쓰는데 도움이 되었던 유튜브 영상 2개의 링크를 공유합니다.

1. 이연LEEYEON - 나를 괴롭히던 걱정이 사라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u19tbayE8nA

2. 정신과의사정우열 - 감정수업 총정리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P4cn5Xtd7s&t=15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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