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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Sep 12. 2022

7. 드로잉, 다시 만난 섬세함의 세계

펜 드로잉 클래스와 런던에서의 기억

"똥손도 가능한 펜 드로잉"


당x마켓에서 마주친 광고 하나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지가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때 지인 한 분이 가르쳐주셔서 이젤 위에다 포켓몬을 열심히 그렸던 기억이 마지막이다. 미술시간이 있었기에 중고생 때도 그리긴 했겠지만, 몇 명의 특기생과 재능이 넘치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그림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남학생 무리에 있어서 그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봉인되어있던 예술혼이 갑자기 깨어나, 저 수업은 꼭 들어야 한다며 나의 이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무기력을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로 '현재 하는 일과 동떨어진 취미를 가지는 것'이 꼽힌다. 일에 지친 두뇌에 편안함을 주고, 또 초보자일수록 실력이 빠르게 늘기 때문에 보다 쉽게 성취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색칠까지는 할 필요가 없어 부담이 다소 적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드로잉 클래스에 마음속에 유독 끌림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갑자기, 8년 전 런던에서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했다. 



2014년, 코로나도 없고 세계도 지금보다는 평화로웠다고 기억하는 그 시절, 헝가리로 교환학생을 떠나게 되었다. 이전까지 한 번도 유럽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기에 최대한 많은 나라들을 가보고 싶었다. 마침 알아본 비행기가 British Airline으로 런던을 경유하여 부다페스트로 가는 노선이었다. 열심히 방법을 찾다 stop over를 활용해서 런던에 5일간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유럽 도시인 런던, 예나 지금이나 런던의 물가는 배낭여행객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럽다. 하고 싶은 것, 가 보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다행히 박물관과 미술관의 존재는 이상과 현실이 적절하게 타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대영박물관과 내셔널갤러리의 입장료가 무료였기 때문이다. 약탈품과 같은 복잡한 문제가 엮여있지만, 당시 나에게는 살인적인 런던 물가에도 굶지 않을 수 있게 한 소중한 정책이었다.


다만 런던 여행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선명한 장면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마주친 유물이나 그림이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자리를 잡고,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어르신들의 모습이다. 야경 투어에서 만났던 가이드에게 질문하니, 은퇴 후 매일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라고 답해주었다. 가족과 사회에 충실했던 삶이 끝난 후에 이제는 자신에게 충실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삶의 짐을 벗어놓을 수 있는 때가 오면, 비슷한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었다.



오랜만에 이성과 감성이 한마음으로 원하는 일이다. 별다른 고민 없이 클래스 수강을 신청하고 다음날 첫 수업을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옆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계신 분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휴직을 하고 나서는 정신과 선생님 이외 교류하는 남성분들이 거의 없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억제되어있던 것일까? 때로는 밖의 시선이, 때로는 스스로의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막아선 것도 병을 악화시킨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쭈뼛해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웃으시며 자리로 안내하고는, 그림을 그렸던 경험을 물어봤다. 초등학교 이후로 기억이 없다는 말에 대부분의 수강생이 그렇게 시작하니 걱정 마시라는 격려를 들으며 연필과 펜, 지우개, 스케치북 같은 물건을 받았다. 이 드로잉 클래스에서는 0.5mm와 2.0mm의 스테들러 펜을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중학생 때 한 번 모양이 신기해서 샀었는데, 필기용으로는 번지기만 하고 너무 두꺼워서 곧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야 드로잉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수업에서는 간단한 야채 그림을 따라 그려가며 기초를 다졌다.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지킬 사항으로 다음 3가지를 당부하셨다.

1) 연필로 밑그림을 명료하게 그리고, 펜으로는 정확하게 따라 그릴 것
2) 펜으로 그리다 잘못되었다 해서 덧칠하지 말 것
3) 손의 힘을 빼서 필압을 낮출 것

말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것들이었다. 얄팍하게 배운 드로잉 습관이 남아있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밑그림을 덧대고 있었다. 연필을 따라서 펜으로 그리니 머릿속에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이 계속 울렸다. 게다가 실수를 하게 되면 덧칠하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은 바로 30년간 글을 쓸 때나, 그림을 그릴 때나 한결같이 펜을 꽉 잡았던 손의 힘을 빼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필압이 워낙 높아, 다 쓴 공책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곤 했다. 힘을 빼고, 섬세하게 손을 쓴다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비워보려고 애썼다. 돌이켜보면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남들보다 못 그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섬세함과 관련된 가장 예전의 기억은 초등학교 때다. 바느질을 못해서 며칠 동안이나 방과 후에 남아서 못다 한 바느질을 끝내야 했었다. 그때가 손으로 하는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었던 때였다. 못하니까 하기도 싫었고, 안 하니까 더 서툴게 되었다. 결국 펜 드로잉 역시 나를 받아들이고 가꾸어가는 다른 형태의 수양이 되어 버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그리기 시작하니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의식하지 않으면 다시 본능이 튀어나와 돌아가버리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리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1시간 30분이 지나고 첫 클래스가 끝났다. PT를 처음 경험해 본 날, 요가에 입문한 날과 비견될 정도로 피곤함을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를 그려냈다는 성취감 역시 함께 느꼈다.


한 주 한 주 수업이 계속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드로잉들을 익혀가고 있다. '디자인을 직업으로 삼지 않길 잘했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 손을 쓰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큰 변화가 생겼다. 가끔은 클래스에 등록한 다른 선배님들의 화려한 풍경 그림을 보면 어서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조급함이 생기기도 하지만, 일부러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보곤 한다.


다음에 어딘가로 여행할 때는 스케치북과 필기구를 챙겨가려 한다. 사진보다 오래 걸리지만, 시간을 들여 내 손으로 만든 그림으로 마음속에 풍경을 더욱 각인시키고 싶다.




내게 부족했던 건
손의 능력이 아니라
섬세함을 다루는 마음가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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