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기억 조각 일곱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건 아빠 덕분이었다. 오빠를 낳고 기르면서 충분히 힘들었던 엄마는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아빠에게 선포했다. 그러자 아빠는 딸 한 명만 더 낳아달라고 엄마를 졸랐다고 했다. 엄마는 남편의 애원에 못 이겨 딱 딸 한 명만 더 낳기로 결심하고 나를 가졌다. 그러니 아빠 말대로 나는 아빠 덕분에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셈이었다.
니는 내덕분에 태어난 줄 알아라.
아빠의 단골 멘트였다. 내가 엄마랑 짝 지어서 놀러다닐 때면 아빠는 엄마한테 "니 내덕분에 딸 생겨서 호강하네."라고 말하곤 했다. 내심 부러움이 섞인 말투였다. 아빠 말은 딸 낳자고 조른 건 본인인데 덕은 엄마가 보고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다 커버린 딸은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 안엔 섭섭함도 어려있었다.
어린 시절 사진첩 속에 난 항상 아빠에게 안겨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아빠는 오빠에겐 엄격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오빠는 아빠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았고 아빠는 그런 오빠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에 비해 아빠는 딸에겐 약했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아빠는 크게 혼내지 않았다.
그런 탓에 엄마는 항상 오빠를 보호하기 위해 오빠 옆에 있었다. 그리곤 나를 항상 아빠한테 보냈다. 어린 시절 사진 속엔 엄마와 오빠가 한 세트, 아빠와 내가 한 세트로 짝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욕심쟁이었던 나는 엄마의 사랑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엄마가 아빠 옆으로 가라고 할때면 "아빠 옆에 안갈거야. 엄마 옆에 있을거야."하고 외치곤 했다. 나의 땡깡에 어쩔 수 없었던 엄마는 오빠, 나 둘을 모두 데리고 다녔고 아빠는 혼자 걸어다니는 일이 많았다.
사춘기 시절 아빠와 나의 관계는 조금 더 멀어졌다. 그때의 난 조금 예민한 상태였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학원 다니는 것 모두 나에겐 벅차기만 했다. 피곤에 쩔어있었고 누가 건드는 것도 다 싫었다. 당시 아빠는 출근길에 항상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곤 했다. 늦게 준비해서 아빠 출근시간에 맞추기 어려웠던 날도 빨리 준비해서 차 타고가라며 나를 재촉하곤 했었다. 그런 것들이 다 짜증났었다.
하루는 등교 길에 아빠 차에서 계속 자다가 학교에 도착했기에 무심코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아빠는 종종 차 문 좀 살살 닫고 내리라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그 말에 관심도 없었던 나는 그날도 평소처럼 문을 쾅 닫았다. 그날따라 아빠도 예민했는지 내가 차에서 그렇게 내리자 나를 따라 내렸다. 그리고는 "너 내가 차문 세게 닫지 말라고했지?"하고 소리쳤다. 그 말에 나는 울면서 학교로 뛰어들어갔다. 학교 앞에서 소리지른 아빠가 낯설고 원망스러웠던 나는 자습 시간 내내 서럽게 울었다. 아빠도 차에서 울면서 내린 딸이 못내 마음이 쓰였는지 엄마한테 그 날의 이야기를 종종 이야기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예민했고 사람 마음을 몰라줬는지 모르겠다.
직장인이 되고서 아빠와 나의 관계는 또 달라졌다. 직장인이 되고 엄마 아빠랑 함께 살았던 시간이 8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아빠 집에 사는게 세상 편했고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간이 길었던 것이 너무 큰 자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자취생활을 했더라면 엄마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으리라.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엄마 아빠 모두 건강하고 나도 스스로 자리 잡아서 내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시간. 그런 시절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짧을 줄도 몰랐다. 나에게 적어도 이십년 쯤은 남은 줄 알았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난 아빠에게 잔소리쟁이 딸이었다. 아빠는 나를 "내 집에 문간방에 사는 애"라고 불렀다. 내 방이 위치도 그렇긴 했지만 자기 집에 딸려산다는 말이기도 했다. 문간방에 사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한테 온갖 잔소리를 해댔다. 아빠가 군것질할 때면 또 건강에 안좋은 거 먹는다며 엄마한테 이르기 일쑤였고 옆에서 그게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해 종알종알 잔소리를 해댔다. 아빠가 운전할 때는 위험하게 운전한다면서 또 종알종알거렸다. 아빠는 "문간방에 사는 애가 시어마시(시어머니) 역할을 한다면서" 나를 놀려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를 집중 단속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아빠한테 엄마 대신 할 말 다해줘서 속시원하다고 말했고 나는 더 신이 나 아빠한테 기어올랐다. 그럴 때면 아빠는 나를 놀리며 잔소리에 응수했고 때론 머쓱하게 웃었다.
우리가 함께 한 세월동안 아빠와 나의 관계는 계속 변화해왔다. 한 때는 아빠의 사랑을 한껏 받은 딸이기도 했고 한 때는 이유도 없이 짜증을 내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딸이기도 했다. 다 커서는 아빠에게 어른 노릇하려던 딸이었다. 아빠가 더 나이들었더라면 우리의 관계가 또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해진다.
하지만 아빠는 영원히 60대의 나이로 남게 되었고 아빠의 어린 딸은 점점 아빠의 나이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아빠보다 더 늙은 내가 아빠한테 잘 지내고 있었냐며 인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또 날 놀리겠지. "니 진짜 할마시되서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