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enings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 다닌 적이 있어요.
회화학원을 여럿 다녀봤지만 매번 겉도는 수준이었고 뭔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즈음 한 클라스를 발견하게 돼요. CNN 뉴스 듣기. 선생님은 뉴스 스크립트를 담은 소책자를 나눠주고 녹음기로 뉴스 기사를 반복해서 들려줬어요. 학생들은 스크립트 사이사이 빈칸을 채운다거나 어떤 내용인지 추측하고 토론하는 식이었죠. 처음 접하는 미국 방송 앵커의 스피킹 속도는 선생님이 속도를 조작했거나 녹음기 작동을 잘못해서 2배속이 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이런 난이도 때문인지 학생수는 대여섯 명을 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참신하게 다가온 교수법에 주석처럼 달린 단어 리스트와 뉴스 문장들을 공부하며 몇 개월 수강했어요. 선생님은 영어에 빠져 밤새워 듣고 또 들었던 때가 있었다고 하시며 테스트하듯 발만 담가보고 뛰어들지 못하는 학생들이 안타까운 눈치셨어요. 결과적으로 클라스를 그만둘 때까지 리스닝이 크게 향상되진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노력보다 노출빈도였지 않나 싶어요. 내 페이스로 매일 읽고 양껏 들었다면 달라지지 않았겠나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손때를 묻히는 수고를 했더라면. 스스로 필요성을 깨닫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자료로 하다 보니 능동적인 학습 활동이 되지 못한 거였죠.
결국은 방구석에서
그런데 이 뉴스 공부를 몇 년 후 어학연수까지 가서 하게 돼요.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언어의 한계라는 게 현지에 와서도 뼈아프진 않았어요. 티브이를 켜면 딴 세상이었을 뿐. 미드 영드 호드.. 지금껏 공부한 세월이 허망하게 넘어야 할 벽이 여전히 허망거스(humongous 거대)하게 느껴졌어요. 유치한? 드라마 앞에서 존재가 무너져 내리다니요. 다행히 A Current Affair 나 Foreign Correspondent 같은 저널리스트나 뉴스리포터가 나오는 시사프로는 약간 달랐어요. 뭔가 귀에 걸리는 느낌 손에 잡히는 예감이요. 이제 화두는 자연스레 글로벌 이슈, 데일리 뉴스가 돼요. 집에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백그라운드로.
종로의 CNN 뉴스 선생님을 떠올리진 않았어요. 나만의 공부법을 찾은 거라 여겼죠. CNN 뉴스로 공부했던 건 안중에도 없었고 굳이 비교하자면 호주채널 뉴스가 훨씬 느긋하고 쉬웠어요. 그런데 오늘 문득 이 글을 쓰려다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세상에 우연은 없는 걸까요. 선생님의 수업은 알게 모르게.. 그래요 선생님은 무언가에 미쳐서 몰두한 사람이었고 나의 롤모델이었어요.
자막 없는 TV
듣기란 교묘하고 약삭빨라요. 잡힐 듯 말 듯 방금 잡은 물고기처럼 미끄러져 빠져 나가죠. 처음 듣는 단어가 끼어 있으면 속수무책이고요. 뉴스앵커 산드라(호주 채널 텐)의 발음만으로 스펠링을 유추해 봤어요. e va cu ate d. 사전을 들춰보니 신기하게 바로 나와요, 도피했다고. i nun da te d 홍수로 범람해서.. 소리로 스펠링을 유추했어요. 단어 뉘앙스며 단어의 선과 각을 더듬어요. 산드라의 그 순간 표정과 목소리는 강산이 변한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어요.
그 시절 티브이는 자막이 없었죠. 지금은 청각장애인을 위해 모든 프로에 디폴트로 영어 자막이 뜨지만요. 영어 자막이 있었다면 그 시절 저 같은 영어 초보자에게 득이 되었을까요? 오디오와 텍스트사이에서 방황하다 헤매지 않았을까요. 지금 티브이를 보면 그러고 있거든요. 자발적 난항, 안개에 연기가 더해지는 형국이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요.
오디오면 오디오 텍스트면 텍스트
어떤 일이든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고 하면 이도저도 안돼 버리죠. 귀를 쫑긋 세워도 들릴까 말까인데 눈알까지 굴려야 한다면.. 먹먹하죠. 자막 없이 들리는 것 듣고 안 들리는 건 버리고 쿨하게 한번 시청하고 말죠. 재생 안 하는 대신 내일 뉴스를 봐요. 어차피 이슈들은 반복되거든요. 공부가 아니고 소비하는 식으로 가요. 매일 내 영어가 꿈틀대는 감에 중독되어 하루 빼먹으면 섭섭해질 걸요. 단, 그날 헤드라인 기사들을 미리 읽어두는 게 유리하죠. 단어의 뜻과 발음을 미리 체크하는 준비단계를 생략하면 그날의 뉴스 듣기가 흐지부지가 돼요. 들을 때는 영혼을 끌어다 듣기에만 집중해 봐요. 뉴스든 드라마든 영화든 쇼프로든 단순한 감상이 아니고 리스닝 습득을 위한 것이라면 영어든 한국어든 자막은 일단 오프예요.
방송 transcript (이하 스크립트)도 같은 맥락이에요. 스크립트보다는 뉴스기사 문장을 읽고 같은 뉴스를 앵커와 리포터의 다른 문장으로 들으면 내용이 머릿속에 요약 정리돼요. 하나의 이슈를 다른 관점과 다른 표현으로 소화하는 거죠. 스크립트를 읽고 기억해서 따라가는 리스닝이 불확실성에 시달리다 모호하게 끝나버리는 리스닝보다 결국에는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할까요. 읽어서 아는 내용을 들을 때는 식상하기도 하고요. 스크립트에 뭐가 쓰여있건 중요한 것은 내 귀에 포착되는 것을 늘려나가는 것이죠. 반복되는 이슈라도 매일 진전되는 소식을 새로운 문장들로 만난다면 기대감과 지속성을 줄 거예요.
* Listening Tip
관심있는 이슈를 익숙한 흐름에 따라 반복해서 듣는다.
아직 뉴스가 어렵거나 스크립트를 이용하고 싶다면 CNN 10 같은 교육용 뉴스로 시작해 보세요. https://edition.cnn.com/cnn10 스크립트만 여기 모아놨네요. https://transcripts.cnn.com/show/sn 호주 ABC 채널의 BTN (Behind The News)는 세계 주요 뉴스를 쉽게 풀어서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게 실어요. https://www.abc.net.au/btn
월드 뉴스와 함께 방송되는 (미)국내 뉴스도 챙겨 읽고 듣다 보면 그 나라 안 이슈를 알게 되어 시야도 넓어지고 어휘도 폭넓어지겠죠. 방송인이 말하는 속도나 발음, 어휘 사용은 영국 BBC나 미국 NBC, 호주 ABC가 대동소이해요. (캐나다는 미국, 뉴질랜드는 호주와 비슷하다고 가정해요.) 물론 방송인이 아닌 현지인들의 발음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겠죠. 선호하는 나라, 맘에 드는 채널과 앵커를 찾아보세요. 매일 같은 시간대 같은 채널의 동일한 뉴스 프로와 앵커를 정해두고 시청하면 안정감과 익숙함을 줘서 초기적응이 쉬워져요. 뉴스의 긴박하고 들뜬 분위기보다는 차분히 한 가지 이슈에 집중하고 싶다면 KBS 세계는 지금 같은 글로벌 시사 프로를 찾아 구독해 보기를 추천해요.
읽고 듣는 뉴스가 익숙해지면 대화, 내레이션, 스피치, 뮤직등 다른 장르의 언어에도 귀가 열리기 시작해요. 뉴스를 일회성으로 소비했다면 소설은 반복 재생해서 들을 수 있어요. 좋은 작품 하나를 골라 오디오북으로 (소설 읽기 전 후) 틈날 때마다 들어보기를 권해요. 영화나 드라마, 팝송, 각종 시상식 감상을 즐기고 리스닝 연습도 차차 이 방향으로 진화해요. (듣고 낭독하고 녹음해서 내 목소리 들어보세요. 저는 안 해봤지만 많이 달라진다고 하네요.)
듣기는 읽기에 이어 어휘 습득의 그라운드라고 생각해요. 듣고 생소한 단어를 소리 내어 중얼거리면 바로 의미를 알 수 있는 세상이에요 (e.g. 아이폰 시리, ChatGPT). 스펠링으로 사전을 찾아 메모하고 외우려 해도 매번 까먹던 것이 뚜렷한 발음으로 한번 듣고는 기억에 각인되는 경우가 있어요. 읽기가 듣기를 도왔다면 듣기는 기억을 돕고 강화하는 것 같아요.
급한데 건너뛸까?
듣기 초기엔 머릿속이 좀 많이 바빠요. 듣고 있는 문장을 이해하려면 한국어의 개입이 필요하거든요. 다음 문장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진퇴양난이 되죠. 다 캐치할 수 없으니 그때그때 내려놓고 계속 전진할 밖에요. 뇌가 리셋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듣는 대로 한국어 의미가 주마등처럼 번득여야죠. 문맥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하니까요. 의미까지 동시에 헤아릴 수 없다면 우선 들리는 단어만 픽업하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기존 실력보다는 뉴스 시청에 앞서 기사 독해를 얼마나 충실히 했냐에 따라 듣기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고 봐요. 모르는 단어는 앞뒤 문맥으로 유추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그런 스킬도 어느 정도 어휘 실력을 쌓은 다음에 기대할 수 있는 보너스지요. 단어를 아는 만큼 내용 파악이 돼요.
대가 없는 통역이란
이 모든 절차를 미니멀로 하고 싶다면 마음속 우리말 통역을 지워버리세요. 마음속 우리말 번역을 지우자 읽기가 단출해진 것처럼 들리는 대로 들어 버린다면요. 다만 통역도 번역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아요.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할까요. 몇 개월(년)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썰물처럼 빠지고 영어 혼자 남게 되죠. 해석 없이 의미가 녹아들지요. ‘이 컨셉은 한국어로 뭐라고 해야지?’ 영어로 내재화된 의미를 한국어로 표현하기가 애매한 시기가 와요. 영어 어순을 한국어 순으로 거스르지 않고 듣는 순서대로 정보를 처리해 봐요. 언어의 자동화, 무의식의 영역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로 해석해 주는 리스닝 강의는 별 의미가 없다고 봐요. 무엇보다 듣기는 운전처럼 기능적으로 익숙해지는 기술 같아요. 늘어나는 어휘를 윤활유로 매일 여유를 가지고 하다 보면 시나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