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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금명이었다



< 폭싹 속았수다> 를 여러번 보았다.


친정 아버지는 퇴근하시면 아파트 복도가 떠나갈듯 우리 삼남매 이름을 부르시며 현관문을 들어서셨다.


구두를 벗으시기 전에 우리는 아빠의 양손에

매달렸다.

아빠는 누런 봉투속의 통닭이나 상투과자같은

간식거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시면서

" 그래, 내가 이 맛에 살지. 살아." 하셨다.

아무리 늦게 들어오셔도 우리들 방에 들어오셔서 이불을 턱밑까지 당겨 주시고,

발과 다리를 힘껏 주물러주시고 나가셨다.


새학기가 되면 내 손을 잡고 학교앞 문구점에

가서 샤프, 사인펜,지우개, 노트....잔뜩 사주셨다.

집으로 돌아올때 아빠의 등뒤로 어렸던 어스름한 저녁 향기가 난 아직도 느껴진다.


나보고 뭐든지 원하는건 다 하라고 하셨다.

공무원 박봉으로 삼남매 대학까지 전부 보내시느라 아빠의 지갑은 그리 두텁지는 않았던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 다 해줄게" 라는

말씀이 그렇게나 든든했었다.


결혼하던 날,

그런 양관식같았던 나의 아버지 손을 잡고

버진로드위에서 둘이 펑펑 울었더랬다.

남편에게 내 손을 건내시면서 한번 더 꽉

잡아 주셨더랬다.


지금 우리딸들에게 나는 오애순처럼

뭐든지 다 해줄테니 다 해보라고 한다.


난 우리 아버지의 금명이었다.

그리고 내 딸은 나의 금명이다.


그런 내 딸들이 시집을 간다면

나는 기뻐서, 아쉬워서, 안타까워서

3박 4일 울것만 같다.


봄인데 내 마음은 봄이 아닌듯 하고

텅빈 거실이 서운했다.


https://brunch.co.kr/@myeonglangmom/390



https://youtu.be/PT9s8BiTXw4?si=8dm7TLPbZ7xzST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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