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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04. 2020

입사 8년 차

늘 푸르지는 않지만.



관리부의 실수인지 의도인지 ‘임’을 ‘엄’으로 작성한 입사 발령 카드를 입사 메일로 전사에 발송한 이후 일주일 간 엄과장으로 불렸던, 지금은 나의 팀장이 된 임 부장. 그에게 악감정이 생겼다. 웬만해선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않으리라 노력한다. 그 또한 애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임 부장은 그런 나에게 악감정을 강매했다. 딱히 내성적인 성격도 아닌 임 부장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다크템플러의 치명적 공격력(업무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알게 모르게 모두의 측은지심 guy였던 그가 나에게 악감정을 강매한 건 입사 2년 차였던 어느 겨울이었다.어디선가 잔뜩 깨지고 왔는지 꾸욱 눌렀다 땐 것 같은 빨갛게 상기된 엄지 같은 얼굴로 대뜸 나를 불러 세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나?”


한국말로 해야 이해를 하지 이 양반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던 2년 차 병아리는 부리를 꾹 닫았다.


심지어 주먹다짐을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앞  뒤 문맥 없이 쏘아붙이기 바쁜 저런 소리는 아무개의 갱스터 랩이라 생각하자 했다. 본인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평사원을 최선을 다해 돌려 깎았다. 참 저렇게 까지 열심히인 임 부장이 측은했다. 필살기처럼 인신공격 훅을 날렸을 땐 사원증으로 목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존감 마이너스 통장 한도 초과로 감정 부도가 날 것 같은가 보다 하고 가엽게 넘겼다.


어쨌든 모두의 측은지심 가이에게 공식적으로 단단히 깨진 사람이 된 것에 대해서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6년 지난 지금 생각해도 대꾸 없이 버텼던 건 잘한 일이다. 덕분에 나는 참을성이 레벨업 되었고, 흥분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처 마인드를 획득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눈 흘기는 기술을 터득한  부장은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전형적인 개부장이 되었다.


지금도 한 번씩 의례 부딪히지만, 어쩌라고, 뭐 어때요, X 까던가 정신으로 그러려니 한다. 뭐, 전혀 상처 받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여러 의미로 '배울  없는 관계는 없다'라는 걸 몸소 겪으며 개의치 않는 연습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내일 출근길엔 그의 커피를 한 잔 살까 한다. Bless you. 애증 합니다.


회사 생활이 늘 흐린 것만은 아니다. 7월 30일쯤이었나. 장마가 시작됐다. 도로가 발등까지 잠겨 버스를 탄 건지, 배를 탄 건지 의심들 정도로 비가 장대같이 쏟아붓던 날. 집에서 나오자마자 신발에 양말까지, 조금 과장해서 아랫배 빼고 위아래 다 젖은 출근길인데 노면에 튀어 오르는 빗방울들이 신나고 웃겼다. 얼른 출근해서 비가 이랬다 저랬다 비 토크할 생각에 설레었다. 이 기분에 회사를 다니고 있었구나 했다.


참 별것도 아닌 일상이다. 생각의 차이로 비 오는 날을 맑은 날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각자의 복잡한 어딘가에 내장되어 있는 기능이다. 그 기능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를 찾는 건 본인 몫. 나는 어렴풋이 찾은 것 같기도 하지만, 영 멀리 있는 듯 보이진 않는다. 이럴 때 한 번씩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아마추어.

풋내기, 서툰 사람, 비전문가.

미숙한, 치기 어린, 다 자라지 못한.


얼마를 살았던 자기 인생에 아마추어가 아닌 사람이 있을까. 늘 새로운 1초를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새 것이고, 누구나 다 바로 앞의 새 것을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전문가는 없고, 감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인 것 같다. 익숙해짐에 개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새 것에 미숙하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이직을 하지 않는다. 미숙한 것의 첫 느낌이 두려워서 일까. 대학교 졸업하고 들어온 첫 직장을 이직 한 번 안 하고 꾸준히 다니고 있다. 중간에 한 눈을 팔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이력서에 적어냈던 입사 후 포부처럼 난 아직도 이 자리에 있다. 한결같은 소나무처럼. 고인물은 썩는다지만,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선 소나무는 더 굵고 단단해지겠지. 라고 현실안주를 위한 합리화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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