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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03. 2020

무게.

사실 나는 조금 아프다.


명절이 다가오면 의례 묻는다.

 "집에 가세요?" 제 집은 여기입니다만, 고향 집에 가냐 묻는 것이겠지. 가족이 있다는 고정된 전제가 깔린 오류가 많은 질문이다. 경솔한 질문에 정성을 다해 대꾸할 에너지는 절약이 답이다. 그냥 "네" 하고 말아 버린다.


명절도 이제 변화해야 할 때. 서로의 안녕을 묻던 명절은 변질된  오래다누군가에게는 저 자를 묻어버리고 싶은 명절일지도, 이미 모든 게 불완전하지만 더불어 불안전함의 완전함에 박차를 가하는 촉매가 가족이라 탓하고 싶은 명절일지도. 가정은 왜 화목해야만 하는가. 이것도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초등학생 때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서 배운 악보 중에 기억나는 건 '즐거운 나의 집’ 밖에 없다. 처음 가훈이라는 걸 배울 때도 예시는 ‘가화만사성’이었다. 비둘기 다리에 서신을 매달아 보내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파란 눈의 친구와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통화할 수 있고, 사흘 밤낮을 달리던 말 대신 1시간이면 한양에 갈 수 있는 ktx 가 있다.윷을 던지고 널뛰기를 하며 화합을 도모하던 명절은 전래동화 같기도, 판타지 같기도 하다.


모든 게 변화하는데 왜 가족의 정석은 프라이팬의 찌든 기름때처럼 옴짝달싹 안 하는 것인가. 가족은 화목해야 한다라는 정석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다’라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제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이아몬드의 배처럼 그 중간 어디쯤 다수의 사람들이 있겠지. 명절은 그냥 공휴일이다사회가 규정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포지션을 평가하고 그에 대해 후회나 자책에 젖어드는 감정 노동도 불가해야 한다. 지친 노동자들에게 온전히 휴식만 주는 ‘노동 제공의 의무가 없는 날.’ 그 이상은 아니었으면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스트레스 제조 노동자다. 쇼미 더 머니에서 미성년 어린 친구들이 열심히  money money를 외치며 어머니 아버지 집 사줄게 차 사줄게 호강시켜줄게 하는 것처럼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쌓인 빚을 갚으면 행복해 질까. 하는 생각을 한다.


불합리한 상황에 화가 나고, 답답함에 숨이 막혀와도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사회생활하듯 가족을 대하면, 모래성 같은 가정을 붙들어놓는 임시방편 정도는 될 수 있을까. 누구도 내 어깨에 짐을 짊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가족 모두가 측은하고 아리고 아프다.


누가 규정지었는지 모를 ‘가족의 정석’ 안에서 딱 중간의 삶은 살고 싶었다. 나태한 나를 채찍질하고,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을 오독오독 씹어 삼키고 그렇게 단단해져서라도 참 무의미할지도 모를 그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현재도 그러하다. 단 하나 바람은 이 단단함이 제대로 된 벽을 쌓아서 그들에게 좋은 집이 되어주길. 추운 겨울에는 언 몸을 녹여주는 벽이 되어 주고, 뜨거움에 지치는 여름에는 그늘같은 지붕이 되기를. 바람 좋은 가을에는, 꽃이 멋지게 피는 봄에는 모두가 기꺼이한 마음으로 모여 편안히 쉴 수 있는 마루가 되어 주기를. 끝없이 부정하고, 이제는 변화해야 할 때라고 소리 없이 농성을 하면서도 결국 제일 앞서서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거다. 익어가는 계절. 가을. 그 계절의 추석이란 명절에 나의 마음은 익다 못해 overcook 되었는지 새까맣게 탔다.


사실 나는 조금 아픈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 청춘도 청춘 나름이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자. 사서 흙길 걷지 말고, 될 수 있으면  길만 걷자사서 걸어봤자 마지막에 남는 건 더러워진 운동화 빨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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