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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May 01. 2020

인턴이 끝나고 난 뒤

각자의 길로

모든 인턴은 2월 마지막 날까지 근무를 하지만, 종료 약 2달 전인 12월 중순이 되면 저마다의 운명이 정해지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명확해진다. 누군가는 레지던트 합격 통보를 받고, 같은 또는 다른 병원에서 다음 해 3월부터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대부분의 인턴이 레지던트 진급에 성공하고, 3년 또는 4년간의 새로운 배움터 및 일터로 나아간다.


누군가는 탈락 통보를 받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다. 레지던트를 계속하고 싶으면 후기 레지던트 지원을 고려할 수 있다. 이전 지원에서 미달이 발생했거나, 규모가 작은 2차 병원의 경우, 탈락자들을 흡수하기 위한 늦은 선발이 준비되어 있다. 떨어진 김에 조금 쉬는 방법도 있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남자 인턴은 군대에 끌려가서 쉬게 된다. 군필 남자 인턴이나 여자 인턴은 1년 동안 푹 쉬고 내년에 다시 지원을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레지던트를 안 할 생각으로 어느 과에도 지원하지 않은 인턴도 있다. 흔한 경우는 아니다. 보통 인턴을 하면서 의사 생활에 회의를 느낀 친구들이 많다. 이런 친구들은 인턴 중후반부터 다른 인턴들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떠날 준비를 하곤 한다. 심지어 중간에 퇴사를 하려고 했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와 몇몇 직원이 겨우 설득하여 인턴 과정은 마칠 수 있게 도왔다. 이런 친구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 때 생각한 의사의 삶과 인턴의 삶은 많이 다르다.


각자의 미래가 결정되고 나면, 그때부터 인턴의 시계는 매우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과거에 온 힘을 다해 수행했던 인턴의 여러 일들은, 어느새 그냥 기계적인 업무가 되어버린다. 머릿속으로 잠깐 딴생각하고 있으면, 손이 알아서 움직여서 일을 다 해둔다. 12시간 동안 일하고 퇴근길에 되돌아보면, 그날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근무하는 동안 가장 깊게 생각한 것이 ‘퇴근하고 뭐 먹을까’인 날도 많다. 별다른 목표 없이 하루하루 날짜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이 시기에 더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인턴도 있다. 어떤 과에 합격을 하고 나면, 그 과의 예비 레지던트로서 일을 미리 배우기 시작한다. 본래 해야 하는 인턴 일에 더하여 레지던트의 일까지 추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평적 관계였던 인턴 집단에서 벗어나 수직적 관계 위주의 새로운 집단에 소속되게 된다. 위로는 4개년 차의 레지던트와 수많은 교수님이 존재하고, 아래로는 아무도 없다. 과에 따라 2개월 정도를 일을 알려준다는 핑계로 엄청난 업무를 떠넘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 시기에 마음이 바뀌면서 도망가는 인턴도 종종 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인턴의 끝이 보이는 2월의 마지막 주, 조금 더 흘러서 2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도 여느 날들과 다름이 없었다. 다들 마음속으로는 인턴이 끝난다는 게 시원섭섭하고, 1년간 동고동락한 동기들과의 헤어짐이 아쉽지만 따로 모여서 회포를 풀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레지던트 1년 차로 일하는 게 더 중요하고, 내일부터 일하게 될 새로운 인턴들에게 인수인계를 하느라 매우 바빴다. 간단하게 전체가 모여 있는 카톡방에서 서로서로 한 마디씩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내가 보낸 카톡은 이렇다. 조금은 회사 부장님 같지만, 지금 다시 읽어봐도 그때와 같은 마음이다. ‘선생님들 1년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나가다 보면 반갑게 인사합시다. 경조사 있으면 꼭 소식 전해줍시다. 환자나 과보다 본인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 됩시다. 언젠가 모여서 웃으면서 함께한 1년을 추억합시다 우리. 다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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