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리 백성, 피로인을 데려와라!

조선통신사 사건사고 1-2

by 구경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단으로 ‘통신사’가 있어. 그 통신사의 전신인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할 때, 조선 조정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겼어. 하나는 일본의 수도인 에도(오늘날의 도쿄)로 들어가 쇼군을 비롯한 일본 지배층의 속사정을 살피는 것이고, 하나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피로인, 곧 조선 백성을 데려오는 것이야. 일본 학계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적게는 2만 명에서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보고 있어.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해. 왜냐하면, 끌려가던 중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고, 어떤 사람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은 경우도 흔했거든.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전쟁을 치르면 전투하기도 급급할 텐데 어찌하여 왜군은 힘없고 죄 없는 조선 백성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갔을까?


“조선으로 쳐들어가려면 병사 십오만이 필요하다. 빨리 병사를 더 늘리도록 하라!”

“아니, 그렇게 농민을 왕창 데려가면 농사는 누가 짓고, 일은 누가 다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전쟁에 이길 것이니 조선인을 많이 잡아 올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그놈들을 노예나 하인처럼 마구 부려먹으면 될 것 아니냐?”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인을 강제로 잡아가서 노예처럼 부려먹기도 하고, 심지어 멀리 포르투갈 상인에게 총포나 비단을 받고 조선인을 팔아넘기기도 했어. 그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잠시 살펴볼게.


일본 승려 게이넨이 쓴 『조센히닛키』를 보면 피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상인이 앞다투어 왜군을 따라 다니며 ‘사람 팔고 사기’를 하는데 너무나 처참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새끼줄에 목이 엮인 채 앞으로 내몰려 종종걸음을 쳤고, 몽둥이로 때리는 광경이 마치 무식한 죄인을 고문하듯 한다. 들이나 산, 성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쳐 죽이고, 대꼬챙이로 머리를 찌르고, 아비는 자식을 한탄하고, 자식은 아비를 찾으니 처음 본 광경이다. 조선 아이는 인질로 잡혀가 부모와 떨어지니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서로 슬퍼하는 것은 마치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이 고문을 받는 것과 같았다.」


승려였던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 피로인의 처참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지 않니? 아마 실제 벌어졌던 상황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했을 것인데도 이 정도면 뭐, 그 처참하고 끔찍함이란 상상을 초월하겠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끔찍한 생활을 일본인만 고발한 게 아니야. 조선의 유학자도 그 참상을 낱낱이 고발했지. 조선에서 형조좌랑을 지냈던 유학자로 강황(1567~1618)이란 분이 있어. 강황은 임진왜란 때인 1597년 5월 오늘날의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군량을 조달하는 담당관으로 일하고 있었거든. 그때 해안이 왜군에게 점령당해 식구를 데리고 배로 도망치다가 그만 왜군의 습격을 받아 식구 여럿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어. 강황도 물속에 몸을 던졌으나 왜군에게 붙잡히고 만 거지. 그 강황이 쓴 『간양록』에 남긴 기록을 한번 볼까.


「일본 배 안에는 남녀가 뒤엉켜 쓰러져 있고, 배의 양쪽 옆면에는 시체가 어지럽게 산같이 쌓여 있었다. 통곡 소리는 하늘을 찔렀고, 파도도 울부짖는 듯했다.」


실제로 강황의 형제와 자식 가운데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셋, 일본에서 죽은 사람이 둘, 살아남은 것은 여자 자식 하나뿐이었어. 그러니 끌려간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거야.

한편, 끌려간 조선인 가운데도 유학자나 도자기 기술자, 바느질을 잘 하는 사람은 일본에서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어. 왜냐하면, 그런 학자나 기술자들은 일본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었거든! 자, 이 정도면 피로인이 누구인지, 피로인을 왜 문제 삼는지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통신사건, 회답 겸 쇄환사건 조선의 관리가 일본을 오갈 때 이 피로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통신사는 쇼군에게 국서를 전한 다음에는 오로지 피로인을 데려오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대. 하지만 피로인을 데려오는 문제가 조선의 뜻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기록을 보면 1607년에 일본으로 공식 사신이 가기 전까지 되돌아온 피로인의 숫자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고, 1607년 이후 사행 때 돌아온 피로인도 얼마 되지 않았거든. 그래서 조정에선 이를 두고 ‘구우일모’라 했어. 즉, 말 그대로 ‘아홉 마리 소 가운데 박힌 털 하나’니 그 많은 소털 가운데 달랑 털 하나란 소리잖아. 그만큼 적었다는 거야. 그런데 쇼군도 피로인을 데려가라고 허락했건만, 왜 피로인을 되돌려받는 일이 이처럼 쉽지 않았을까?


“다이묘님! 바쿠후와 쓰시마 번에서 임진왜란 때 붙잡아 온 조선인을 돌려보내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조선에서 목숨 걸고 잡아 왔는데 왜 보낸단 말이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어디서 저토록 훌륭한 도공, 뛰어난 바느질꾼을 구할 수 있겠소? 쓰시마야 조선에 잘 보여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우리는 굳이 그럴 까닭이 없지 않소?”

“맞습니다! 피로인도 이제는 대부분 결혼해 아이까지 두고 있으니 쉽사리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일본 사람이 다 되었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그뿐만 아니라 쇼군이 ‘되돌아갈 마음이 있는 피로인만 돌려보내라!’고 했잖소? 그 말은 곧 우리가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피로인이 아예 사신을 만나지 못하도록 잘 살피도록 하시오!”


< 표 1 > 1605년에서 1643년 사이에 사신이 데려온 피로인 수


연 대 내 용

1605 1,390여 명 / 사명대사

1607 1,240명 / 회답 겸 쇄환사

1617 321명 / 회답 겸 쇄환사

1624 146명 / 회답 겸 쇄환사

1643 14명 / 통신사


< 출처 : 이원식, 조선통신사 >


사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명대사가 공식적으로 피로인을 데려온 1605년 이전에도 우리가 데려왔거나 일본에서 보낸 피로인이 있었거든. 1599년에 15명, 1600년에 520여 명, 1601년에 250여 명, 1602년에 230여 명, 1603년에 200여 명 등이야. 한편, 강황처럼 도망쳐 온 사람도 있는데, 1600년에 약 50여 명이 도망쳐 왔지.


아무튼, 왜 피로인이 쉽게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짐작이 가지? 일본 바쿠후는 조선 사신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피로인을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애써 나서지 않았으니 그 일이 잘 될 턱이 없지. 그런데 이런 사정 말고 또 다른 사정도 있어서 피로인이 쉬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 대체 어떤 사정이 더 있을까?


일본으로 가서 피로인을 만난 사신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자극하며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달랬으나 그다지 성과가 없었대.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피로인은 양반 계층 아니면 일본에서 먹고사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었거든. 그와 달리 일본에 처자가 있거나, 먹고 살 만하면 거의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거야. 또, 피로인 사이에 나쁜 소문도 널리 퍼져 있어서 더더욱 어려움이 컸다고 해.


“조선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은 먼 곳으로 귀양 보내고, 어떤 사람은 따로 모았다가 종으로 부려먹는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도운 사람이나 양반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솔직히 말해 조선에서 먹고 살기 힘든 평민이 일본에서 잘 산다면 굳이 조선으로 되돌아갈 까닭이 없잖아? 또, 전쟁 때 썩어빠진 양반을 혼내주거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왜군을 도운 백성도 있었는데, 그들은 설령 돌아가고 싶어도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돌아올 수 없었던 게지. 실제로 이문장(?~?)이라는 피로인은 다음과 같이 떠들고 다녔어.


“조선의 법이 일본만 못하고, 생계가 어려워 살 수 없으니 돌아가도 아무런 득이 없다!”


그럼 실제로 일본으로 간 사신의 눈에는 이 문제가 어떻게 비쳤을까?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강홍중(1577~1642)이 쓴 『동사록』을 보면 잘 살펴볼 수 있어.


“일부 피로인은 돌아가기를 애걸하기도 하고, 일부는 빚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하여 대신 갚아주었다. 한편, 일본에는 물자가 많고 백성이 편안해 살기가 넉넉하며, 피로인도 수년 사이에 수백 금을 모았으니 이 때문에 돌아갈 뜻이 없다. 심지어 양반의 자식조차 돌아간다 하고선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시기에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간 이경직(1577~1640)이 쓴 『부상록』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어.


“지나오는 길에 간혹 피로인이 있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일본의 도읍지인 에도에 도착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잇달았으나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잡혀 온 사람은 말이며 하는 짓이 왜인이었는데,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아는 까닭으로 통신사를 만나러 온 것이고, 조선을 그리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생계가 조금이라도 넉넉하여 이미 뿌리를 박은 사람은 돌아갈 뜻이 전혀 없었다.”


그런 탓에 피로인을 데려오려고 엄청 애썼음에도 데려온 피로인은 얼마 되지 않았던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어렵사리 되돌아온 피로인을 조선에서는 어떻게 대했을까?


1624년 사행 때 데려온 피로인의 보기를 들어볼게. 앞서 강홍중, 이경직이 사신으로 다녀온 때야. 사신이 피로인을 가까스로 달래 조선으로 데려왔으나 그 대접은 형편없었대. 임금님까지 나서서 피로인을 데려오라 했건만, 정작 부산에서는 피로인에게 줄 양식이 없어 사신이 먹던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어. 또, 피로인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아 사신이 피로인의 고향에다 편지 한 장 달랑 써주는 게 고작이었고. 그러니 일본에서 피로인을 조선에서 푸대접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이런 점은 우리가 지금도 곰곰이 생각할 대목이라 할 수 있어. 비록 임진왜란이 끝난 뒤여서 조선의 살림살이가 어렵다 하더라도 머나먼 바다 건너 왜국에서 실컷 고생하다 온 사람을 따뜻이 맞이해야지, 그렇게 내팽개치듯 하면 누가 좋아할까! 사실, 조선도 일본처럼 기술자나 도공을 어느 정도 떠받들었다면 피로인이 되돌아오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


생각 거리)


일본은 임진왜란 직후를 봐도 어떤 일을 처리하는 체계가 꽤 잘 구축돼 있음을 알 수 있어요. 피로인의 경우만 해도 양반 출신의 지식인, 도공이나 바느질꾼처럼 기술자, 일반인 등으로 구분해 일본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했거든요. 반면, 조선은 임금이 어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온 피로인을 도와줄 대책을 성심껏 세우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지요. 이처럼 어떤 일이 생기면 그에 대한 대처를 잽싸게 체계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는데요, 그건 외교 관계도 마찬가지라 하겠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한일외교 관계에서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 무역 갈등처럼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준비를 해야 일본에게 당하지 않고 일본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요? 또, 가장 평화롭게 두 나라 모두 득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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