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찐찌니 Jan 06. 2024

지혜롭게 산다는 건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과연

언제부터인가 똑똑한 사람보다는 현명한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가끔은 우둔하고 멍청해 보이는데 또 지나고 보면 그 행동이 타인을 위한 배려가 묻어 있고 본인의 삶에 녹아 있는 사람, 조금은 덜 똑똑해도 현명해 보이는 사람.


어릴 때는 작은 지식도 배우면 곧잘 머리에 쏙쏙 들어와 툭 치면 술술 나오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지식이 굉장한 것인 마냥 우쭐대고 어깨뽕을 이만큼 넣고 다니다 더 큰 지식을 마주하면 와장창 무너지기를 반복하곤 했다. 그렇게 10대를 지나 20대를 겪고, 30대를 넘어 40대가 되고 보니 지금 내게는 그 작은 지식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아이를 낳고 더욱 심해진 건망증은 그나마도 빠르게 꺼내오던 지식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고 그나마도 한잔 술로 풀던 스트레스해소용 취미는 그 기억마저도 통째로 삭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내가 믿지 못하고 검색과 타인의 말을 통해 검증을 받아야만 믿는 상황이 되고서야 내가 그동안 안다고 믿어 왔던 지식은 단 한순간도 내게 지식으로 들어와 있었던 적이 없구나 알게 되었다. 이해가 빠르고 빨리 배우는 것을 장점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더니 잊어버리는 것도 빠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얼마나 멍청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다닌 것인지 돌아보면 그저 부끄럽다. 


회사를 다니며 여러 사람을 보다 보니 점점 나의 부족함이 부각되고 그것을 받아들일수록 몸도 마음도 아파왔다. 통증이 동반된 속상함은 좋은 핑계가 되어 언제든 도망갈 구실이 되었다. 실제로 아팠으니까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명은 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통증인지를.

해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무한궤도에 오른 악순환은 고착화되어 점점 당연시되고 익숙해져 갔다. 

그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 스스로이기에 그 모습에 더욱 깊은 상처의 골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문득 사무실 한켠 늘 무던한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일을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하지도, 일을 미친 듯이 좋아하지도, 사람에 크게 동요하지도, 그렇다고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혈한이지도 않은 그 아이는 그저 말 그대로 묵묵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동참하지 않고 주변의 과도한 열기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그 아이를 향한 시선들은 점차 싸가지 없는 놈, 이상한 놈 에서 묵묵한 놈, 말없는 놈, 그냥 원래 그런 놈 이렇게 변해갔다. 

 왕따도 아닌 데 혼자 다니고 제일은 따박따박해내고, 타인의 것은 칼같이 잘라내고도 욕먹지 않는 신기한 녀석이 기준이 되고 보니 회사에 필요한 사람과 아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과한 사람들은 항상 일을 그르치거나 일을 크게 만들어 주변을 힘든 상황에 처하게 만들기 일 쑤였고, 모든 것이 지나치게 부족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두배로 만들어 주곤 했다. 

이러나저러나 피곤하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나름의 장점들이 있으니 그럭저럭 이어져 갔다. 


시간이 지나고 회사가 힘들어지고, 나의 역할이 견디기 힘들어지는 지경에 와서야 그저 무던했던 그 아이가 왜 어느 순간 기준이 되고 중심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똑똑하게 굴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현명하게 살았던 것이다. 

회사에서의 자신의 롤과 역할의 범위는 과해도 부족해도 항상 탈이 나게 마련인데 적정선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반면 나는 과하게 사랑했고 과하게 몰입했다. 7년을 그리 사랑했으니 그 실망감은 오죽 컸으랴. 

뜨겁게 사랑한 만큼 식으니 강철보다 단단하게 굳어버리더라. 그때 팽팽 돌아가던 머리도 함께 작동이 멈춘 듯하다. 내 모든 작동 회로는 그 시절 너무 끌어다 써서 지금은 아무리 기름칠을 해도 삐그덕 삐그덕 소리만 날뿐 생산성이 너무 떨어진다. 똑똑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하게 살아온 것이다. 


40대가 되고 보니 시간의 흐름이 20대와는 여실히 다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내 언어로 전환되어 돌아오는데 시간이 꽤나 많이 걸린다. 심지어 그게 제대로 이해한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 중간에 소통에 오해라도 낄새라면 프로세스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또다시 지식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다. 

내가 잘 몰라서 이런 게 아닐까? 나의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분명 정말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업데이트되지 않는 옛 지식은 더 이상 쓸 곳 없는 쓰레기가 되는 데는 고작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는 빠른 변화가 생활화된 요즘 끊임없이 지식을 업데이트해 주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진짜 아는 것'과 '아는 척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나눌 수 없는 법인데 자꾸 억지로 나누고 사용하려 하니 탈이 난다. 그렇다고 마냥 다 모른 척을 하자니 그것도 나름 곤욕이다. 20대는 그럴 수 있는 나이라 치고, 30대는 살짝 눈치 보이는 정도라면, 40대는 글쎄.. 그냥 폐급취급이다.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40대는 노인취급이라 인생이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40대가 되고 다시 바라보니 40대는 여전히 애다. 몸만 컸지 정신도 마음도 여전히 불완전한 미성숙한 존재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내가 틀린 것을 누군가가 도와줬으면 좋겠고, 잘하면 칭찬도 받고 싶은 그저 여전히 자라고 있는 과정의 한 순간일 뿐이다. 

억울한 상황이 되면 화가 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프고,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쁜 것처럼 감정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과 사회 속의 관계와 상황 속에서 가끔은 감정을 다스리는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 잘 되는 사람들을 우린 어른스럽다고 말하곤 한다. 

'라떼는 말이야~'가 아닌 '구지식을 기반으로 지금 상황을 바라보면'이라고 표현하는 어른의 입장으로 말하기 위해 오늘도 지금의 지식들을 조금씩 업데이트해간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조금 지혜로워져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이다. 


이전 07화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