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온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을 본 날이야. 대극장에서 서커스를 보고 왔거든. 물론 한국의 공연장에 비하면 택도 없이 적은 사람이지만.
오클랜드에서는 스파크 아레나라는 커다란 종합운동장에서 가끔 공연을 해. 내가 지나다닐 일이 없는 곳이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같이 살고 있는 플랫메이트 소피가 정보를 줬어. 딱 이번주에만 서커스를 한다고 말이야. 서커스든 뮤지컬이든 콘서트든 기회가 되면 뉴질랜드에서 무조건 보라고 하더라고. 여기서는 티켓을 구하기가 아주 쉽다나.
소피한테 이야기를 들은 게 금요일 밤이었는데, 과연 인구 밀도가 낮은 자연의 나라답게 하루 앞둔 주말 티켓도 충분히 남아 있더라고. 공연장의 좌석 수보다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수가 더 적은 가봐. 좋은 자리부터 맨 위층 먼 자리까지 종류별로 선택의 여지가 있었어. 선택할 수 있는 좌석은 많았지만 가진 돈은 적었기 때문에 제일 싼 좌석을 예매했어.
사실 나는 라스베가스에서 태양의 서커스를 본 적이 있어. 여기저기 정신없이 끌려다니는 패키지 여행의 옵션 중 하나였는데, 슬프게도 거의 기억이 안 나. 굉장히 비쌌던 건 기억나는데. 그래서 첫 해외여행이었던 미국 패키지 여행을 끝으로 패키지 여행은 절대로 하지 않아. 직접 알아보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그런 건지, 아니면 하루에 너무 많은 곳을 다녀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 아무튼 이번 기회에 직접 예매해서 느긋하게 즐겨보면 서커스에 대한 기억이 달라질까 싶어서 저렴한 좌석으로 시도해 본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커스는 우리 부부의 취향은 아닌 것 같아. '저렴한 티켓을 사길 잘했다' 뭐 그런 생각을 했어. 뮤지컬처럼 스토리가 있어서 뒷 내용이 궁금하다거나 마술처럼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진다거나 그랬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을 텐데, 예측할 수 있는 일들이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펼쳐졌거든. 특히나 태양의 서커스 크리스탈 편은 아이스링크장에서 스케이트를 신고 선보이는 쇼인데, 우리는 김연아를 비롯한 뛰어난 선수들의 쇼에 이미 익숙해져 있잖아. 음악과 함께 춤추는 공중 그네는 신비롭고 아름다웠지만 그 외에는 평범한 아이스 쇼 같았어.
그나마 나는 피겨스케이팅 대회나 아이스 쇼를 일부러 찾아볼 만큼 좋아해서 꽤 만족스럽게 즐겼는데, 남편은 엄청나게 졸았어. 정신을 못 차리다가 박수 소리가 들리면 깨어나서 어색하게 손뼉을 치더라고. 남편은 원숭이도 불도 없이 스케이트만 타는 걸 서커스라고 부를 줄 몰랐대. 그래도 앞쪽 좌석에 앉았으면 잠들지는 않았을 거라나. 태양의 서커스를 두 번이나 본 입장에서 감히 추측해 보건대 앞자리였더라도 남편의 취향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어. 온통 자연뿐인 뉴질랜드에서 도시적인 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기로 했으니까.
오늘의 Tip 오클랜드 공연은 Spark 아레나, 또는 The Civic 극장 중 한 곳에서 진행됩니다. Spark 아레나는 잠실종합운동장처럼 규모가 큰 원형 경기장이고, The Civic은 뮤지컬 공연을 주로 하는 극장으로 영화관도 겸하고 있습니다. 공연 정보는 sparkarena.co.nz 사이트, aucklandlive.co.nz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