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위스 유람 feat. 산소 분압과 호흡

구름을 향해 내달리는 열차

by 여행하는 과학쌤
구름을 향해 내달리는 열차


새벽 다섯 시쯤 독일을 떠나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향하던 기차 안이었다. 기차에서 잠을 잔 뒤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던 계획이었지만, 계획이란 놈은 그대로 흘러갈지 아닐지 불안한 마음만 증폭시키는 존재였다. 열두 시에 인터라켄에 도착했어야 할 기차가 조금씩 연착됐기 때문이다.


아예 저녁 늦게 도착할 분위기면 마음 편히 곯아떨어지기라도 할 텐데, 야금야금 밀당을 하는 통에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기차의 도착 예정 시간이 바뀔 때마다 알프스 산맥의 수많은 봉우리 중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아보느라 바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알프스의 산악열차는 정해진 시각에만 움직이기 때문에 어딘가에 고립되지 않으려면 이동 계획을 잘 세워야 했다. 기차 안의 나는 무수한 숫자들과 생소한 마을 이름들로 채워진 토끼굴 속으로 빙글빙글 떨어지는 앨리스였다.


인터라켄 동역에 내리자마자 숙소에 짐만 던져두고 숨가쁘게 역으로 다시 뛰어가 열차에 올랐다. 산악열차는 청량한 배경 사이를 달려 앨리스나 하이디의 앞치마가 떠오르는 마을 그린델발트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면 눈 덮인 산이 보였고, 아래로 눈길을 주면 들꽃과 빨간 스위스 국기를 품은 나무 집들이 있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존재도 몰랐던 그곳에 숙소를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시리게 아름다웠다.


그린델발트에서 곤돌라로 갈아타면 해발 2168m의 봉우리 피르스트로 향한다. 높이 올라가니 다른 세상처럼 추워진 날씨에 몸이 떨려왔다. 맨몸으로 줄에 매달려 꼭대기로 날아갔다 오는 놀이기구까지 타고 나자 머리도 어지러웠다. 한라산보다 높은 곳까지 곤돌라를 타고 순식간에 올라와서 액티비티를 즐겼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고산병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겁쟁이인 나는 마운틴 카트를 타고 하산하기로 했다.


마운틴 카트의 운전대에는 브레이크만 달려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떨어지기 때문에 가속기는 필요 없다. 흰 눈과 초록 들판이 한 시야에 잡히는 풍경 속을 달리는 동안 유명한 미술 작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저 멀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높이감에 짜릿했고, 운무 속에서 시야가 가려질 때는 구름을 향해 내달리는 듯 황홀했다. 놓치기 싫은 순간들을 기억 속에 쌓아두는 동안 막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린델발트에서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마지막 산악열차를 놓치면 방법이 없다. 기차역까지 최선을 다해 뛰다가 호흡이 가빠지자 잊고 있었던 고산병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 천천히 걷자. 열차를 놓친다 해도 괜찮아. 이 눈부신 마을에서 예정에 없던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낭만적인 일이니까. 이런 풍경 속에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긍정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섯 번째 과학 유람, 산소 분압과 호흡


아름다운 지구의 중력은 마운틴 카트뿐만 아니라 기체 분자도 아래 방향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체의 양이 부족해진다. 지구를 둘러싼 공기층에는 다양한 기체가 혼합되어 있는데, 그 중 특정한 기체의 압력을 분압이라고 한다. 높은 지대에서는 모든 기체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 활동에 꼭 필요한 산소 분압 역시 낮아진다. 해발 0m에서의 산소 분압이 160mmHg인 것과 비교했을 때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의 산소 분압은 50mmHg 정도에 불과하다.


기체는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확산되는데,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확산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깥의 대기보다 폐포 안쪽의 산소 분압이 낮기 때문에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산소가 확산되어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더라도 폐에 일부 남아 있던 잔류 공기와 섞이기 때문에, 폐 안쪽은 대기보다 산소 분압이 항상 낮을 수밖에 없다. 폐포 안쪽 공간의 산소 분압은 104mmHg 정도로 조직 세포에게 산소를 공급하기에는 충분할 만큼 높은 압력이면서, 대기의 산소 분압인 160mmHg보다는 낮은 압력이기 때문에 원활하게 산소가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발 3000m 높이로 올라가면 공기의 양이 70% 수준으로 줄어들면서 산소 분압이 감소한다. 해발 3000m 대기의 산소 분압은 폐포 안쪽의 산소 분압과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에 충분한 산소가 폐로 확산되어 들어오기 어렵다. 체내 산소가 부족해지니 두통이나 어지럼증과 같은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고, 더 많은 산소를 들이마시기 위해서 호흡수를 늘리게 된다. 높은 산 위로 올라가면 낮은 지대에서 움직일 때보다 호흡이 가빠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지금 가쁜 숨을 내쉬며 서 있는 이곳은 해발 몇 m 였더라. 아직도 구름 위를 달리는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그린델발트에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숨을 마셨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시린 풍경들이 산소와 함께 내 안 어딘가로 깊이 들어와 박혔다.



keyword
이전 04화호주 유람 feat. 코알라와 유칼립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