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오퐝 샹차이
뚜오퐝 샹차이
이번 야시장도 허탕이다. 아이스크림 먹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세계 각지의 요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땅콩 아이스크림만은 예외다. 우도 땅콩을 갈아 넣은 제주도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나 편의점에서 파는 땅콩버터맛 콘아이스크림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낯선 열기와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 고수와 함께 버무려진 대만 땅콩 아이스크림의 이질적인 달콤함을 찾아 야시장을 헤매는 중이다.
대만에 가기 전까지는 한자를 읽을 줄 모르는 상태로 중화권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음식 사진 없이 한자만 빼곡한 메뉴판을 보고 뒤돌아 나오거나, 한자만 적혀 있는 무인 기계 앞에서 결제에 실패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또 버스의 안내 방송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정류장 지도에 적힌 한자와 연결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든 이동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타이베이에서 출발해 지우펀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동안 일정이 지연되는 것은 당연했다.
오전에 숙소를 나섰는데도 지우펀에 도착하자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구불구불한 계단에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뚜름하게 들어오자 거리에 등이 켜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었다는 붉은 등, 골목마다 풍기는 낯선 향신료와 기름 냄새, 쾌활한 에너지의 이국 언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둘둘 말아낸 땅콩 아이스크림이 지우펀에 있었다.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감싼 전병의 쫄깃함 아래에 땅콩 조각이 바삭하게 씹혔고, 꿀꺽 삼키고 나면 달콤함과 고소함, 그리고 고수잎의 향이 입 안에서 제각기 튀었다. 전혀 다른 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개성 뚜렷한 조합이 뜻밖에도 어우러져 눈이 크게 떠졌다.
한국에서 파는 땅콩 아이스크림에는 이 오묘한 어울림이 없다. 전병의 질감이 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수가 빠져 있다. 대만에서 아이스크림을 말던 주인장도 나를 보고는 고수가 담긴 통을 열지 않았다. 말없이 손짓만 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리라. 내 아이스크림에도 고수를 넣어달라는 시늉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못 먹을 것이 뻔한데 도와줘도 모르는 얼간이를 어찌할까 고민하는 시선이었다. 모든 여행 책자에는 "bu yao xiang cai(고수 빼주세요)"만 안내되어 있다. "duo fang xiang cai(고수 많이 넣어주세요)"를 알려주는 가이드북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어설픈 손짓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쟁취한 고수를 품은 아이스크림에 거리의 붉은 빛이 비추었다. 낯선 신비함이 더해졌다.
세 번째 과학 유람, 후각 수용체와 SNP
고수의 비누 향을 바탕으로 2012년 한 연구팀에서 고수에 대해 호불호가 생기는 이유를 추론한 논문을 발표한다. 고수와 비누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물질 중 알데하이드 작용기를 가진 방향성 화합물이 있다. 사람의 11번 염색체에는 이 화합물과 결합하는 후각 수용체를 암호화하는 유전자가 위치한다. 연구팀은 이 후각 관련 유전자 집단에서 개개인의 특성을 결정하는 단일 염기 다형성(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마커를 발견했다.
사람의 유전물질인 DNA는 뉴클레오타이드라는 기본 단위체가 길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다. 각각의 뉴클레오타이드에는 아데닌(A), 구아닌(G), 사이토신(C), 타이민(T)의 네 가지 염기 중 하나가 포함되어 있으며, 뉴클레오타이드가 길게 결합할 때 이 염기들의 나열 순서에 따라 생명체의 유전자가 결정된다. 모든 사람의 DNA 염기서열은 99% 이상 동일하며, 1% 이하의 염기서열 차이가 각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결정한다. 이때 동일한 염기서열 중간에 사람마다 단 하나의 염기가 차이 나는 부분이 있는데 이러한 DNA 변이를 단일 염기 다형성(SNP)이라 한다. 11번 염색체의 후각 수용체 유전자 부분에 위치한 단일 염기 다형성(SNP)에 의해 고수에서 비누 향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뉠 것이라는 추론이 연구의 주된 내용이다.
연구 논문에는 유럽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데이터가 주를 이루긴 했지만, 남아시아보다 동아시아에서 비누 향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조금 더 높다는 통계 자료도 있었다. 한국인인 나에게 고수를 주지 않던 대만 주인장에게도 나름의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셈이다. ‘대만 땅콩아이스크림’이라는 이름을 걸고 고수가 빠진 아이스크림을 파는 한국 주인장 역시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다. 다소 평범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면서 머릿속으로 뒤늦게 중얼거렸다. "뚜오퐝 샹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