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여행지에서는 마냥 용감하지 못할 수 있다.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나 역시 혼자 수십개국을 여행했지만, 특별히 용감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남들과 스케쥴을 맞추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치를 조율하다보면 여행지를 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십상이었다. 결국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혼자 떠나보기로 했다. 일단 마음을 먹자 뭐든 결정이 쉬웠다. 내 마음 외에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었으니까. 이탈리아 해변 마을에 대한 노래 ‘친퀘테레’를 듣다가 단숨에 로마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스물다섯 겨울, 혼자만의 첫 여행이었다.
낯선 떼르미니 역에 내리자,애써 눌러두었던 두려움이 솟아 올랐다. 집시들이 너무 많아서 제발 눈이 마주치지 않길 빌며 걸었고, 어눌하게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곁눈질로 간신히 길을 찾았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혼자 벽을 세우고 경계하느라 숙소까지 걷는 짧은 시간 동안 진이 다 빠져버렸다.그러니 오후 늦게까지 숙소 밖을 나가지 못하고 방 안에서 마음을 추스를 수 밖에 없었다.
여행 첫날을 이렇게 날릴 수는 없는 법이다. '딱 한 군데라도 가보자.' 용기를 모아 판테온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그런데 창 밖으로 보이는 비슷한 양식의 건물들 틈에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몇 번째 정류장인지 세어보다가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옆에 있던 중년의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판테온..?” 한 단어를 뱉으며 여행책의 사진을 가리키자 익숙한 미소가 돌아왔다. “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해. 지금 내려!” 이탈리아어였는데도 그 뜻은 명확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콜로세움 매표소에서 만난 외국인과 저녁을 먹거나, 지하철에서 만난 한국인과 트레비 분수에서 소원을 빌면서,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폴리의 유명한 피자집 앞에서는 수많은 인파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비어있던 한 자리로 즉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기쁨의 형용사를 내뱉자 앞에 있던 동양인 손님이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배를 채운 우리는 비가 내리는 나폴리 항구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길을 응원해주며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국 땅에서 혼자 내딛는 걸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첫 번째 과학 유람, 위험과 보상의 뇌과학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할까.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감정이나 인지를 주관하는 것은 우리의 뇌다. 대뇌 겉질과 간뇌 사이에 변연계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곳에서 감정이나 동기 부여를 담당한다.
변연계에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가 있다. 주의 집중이나 감정 처리와 관련된 부분이다. 특히 본능적인 공포나 불안감, 불쾌함을 불러일으켜, 그 공포를 없애는 안전한 방향으로 행동하게끔 유도한다. 낯선 환경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 피식자가 포식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편도체에 의한 현상이다. 편도체가 파괴된 쥐는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공포와 불안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감정인 것이다. 사람의 경우에도 편도체가 망가진 환자는 위험한 물건에 망설임 없이 손을 대고 기이한 상황에서 아무런 위험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존재한다. 위험 신호에도 불구하고 보상이 따르는 경우이다. 변연계의 일부인 측좌핵이라는 부분은 쾌락과 관련된 영역으로 보상을 얻기 위한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욕이나 성욕을 해소할 때, 목표할 일을 성취하거나 원하던 물건을 얻을 때, 측좌핵을 포함한 회로가 활성화돼 쾌락을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상품 광고나 음식 광고 역시 측좌핵을 자극시킨다. 광고를 보고 측좌핵이 더 많이 활발해지는 사람은 통장 잔고나 비만 같은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물품을 구입하고 음식을 주문하는 경향이 있다. 물건을 사고, 밥을 먹고, 새로운 길을 걷는 모든 순간에 우리의 뇌는 위험과 보상을 고려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길은 두렵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도전이 쾌락을 주기도 한다. 이탈리아 곳곳의 풍경과 유적들도 경이로웠지만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더 설레었다. 때로는 스쳐지나가는 낯선 이와의 대화가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법이다. 현실의 무게나 배경을 걷어내고 내 안의 작은 알맹이를 꺼내어 무슨 이야기든 나누어도 괜찮기 때문이다. 혼자 걷는 여행 중에 마주한 크고 작은 인연들은 숨어 있던 나를 찾아주고 다시 현실을 살아갈 작은 힘을 주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내딛었기에 얻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