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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삶 Oct 30. 2022

일 년을 마무리하며

병원에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체감이 안될 때가 많다. 

넋 놓고 살다 보면 어느새 주말이 돼있고, 연차를 쓸 때가 돼있고,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게 된다. 


#나의 일과

아침에 이르면 6시, 늦으면 7시 즈음에 일어나서 대충 얼굴 씻고 스크럽으로 갈아입고 가운 챙겨서 병동 아침 라운딩으로 도는 걸 시작으로 밤새 있었던 환자 관련 보고사항 정리해서 원장님들께 보내면 8시. 일단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급식실에 가서 아침을 챙겨 먹고 의국에서 처방 넣고 경과기록지를 작성하면 어느덧 9시다.


9시부터는 각자 그날 맡은 일을 하고 중간중간 원장님과 병동 사이에서 생기는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12시가 돼있고, 점심시간이다. 오전 업무로는 오전 병동 ICT, 건보 환자들 침 치료, 가끔은 TA 환자들 침 치료까지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일찍 입원 오는 환자들 입원받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어쨌든 오전에는 병동에 여러 지시사항들을 전달하는 게 대부분이다. 원장님이 출근 후 인턴들에게 내리는 지시사항을 다시 병동 간호 선생님들께 알려주는 일인 것이다. 누구님 MRI 시간 잡아줄 것, 누구님 퇴원 진행해줄 것, 누구님 외출 컨펌되었음 등.


누군가는 점심을 포기하고 잠을 선택하며 당직실로 돌아가고, 나는 역시나 기계처럼 점심을 먹으러 다시 급식실로 향한다. 이제 그날 메뉴가 뭔지 식단표를 확인하는 것조차 내겐 의미 없는 행위가 되고 있다. 어쨌든 점심을 거르면 그날 오후에 힘든 건 나일뿐이라서, 귀찮아도 먹는 게 내 살 길이다. 의료진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일단 한 그릇 뚝딱하는 게 버릇이 되고 있다. 원래도 편식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징어는 걸렀던 사람인데 이젠 그런 사치는 부리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2시까지 점심시간이라, 가끔은 당직실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잠이 영 안 오면 의국이나 당직실 침대에서 조용히 책 읽거나 글을 쓰기도 한다. 물론 밀린 업무가 있거나 퇴원 환자가 많은 경우에는 다른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의국으로 일하러 간다. 


2시가 되면, 병동 오후 침 치료를 시작한다. 내가 담당하는 원장님들이 휴진이면 그 원장님들의 환자분들은 오후 침 치료를 할 필요가 없지만,  안 쉬는 다른 원장님들의 환자들 수를 세고 최대한 다른 인턴 선생님들과 환수를 맞춰본다.  


예전에는 침 치료만 하면 됐는데 이젠 오전 오후에 ICT치료도 병동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아주 시간을 잘 써야 한다. 운이 나쁘면 5, 6층 두 개의 층을 왔다 갔다 하면서 침놓으러 다녀야 할 수도 있다.  6층 환자분들부터 치료 다 하고 5층으로 가려고 했는데 6층에 사람이 없어서 환자들 찾는 전화 돌려놓고 5층에 내려갔더니 다시 오셨다고 하셔서 올라가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화 내면 내 기분만 나빠지니, 아니 그리고 환자들도 화장실도 가고 싶을 때 있고, 편의점에서 뭐 사러 나갈 수도 있는 거니까. 하필이면 내가 찾아갔을 때 자리에 없는 거일 수도 있으니. '그럴 수 있지' 마인드를 장착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이롭다. 


2시에서 보통 3시 언저리에, 길면 3시 반 넘어서까지 침 치료를 하게 된다. 한 명당 10-15명의 환자 침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건 주중이고, 토요일에 두 명만 근무하는 경우에는 20명씩 하게 된다. 어느 토요일에는 22명을 침 치료했다. 중요한 건, 침구실에 환자가 직접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카트를 끌고, IR기기를 끌고 다니면서 침 치료를 하러 찾아가는 시스템이라는 것. 엄청난 유산소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고 나면 목이 절로 쉬고 점점 목소리 톤이 일정해지는 걸 나 스스로도 느낀다. 


침 치료를 얼추 끝내면 3시부터 3시 반 사이에 입원 온 신환들을 만나러 간다. 이미 간호 선생님들이랑 한차례 문진을 거쳤지만 또 EMR에 경과기록지, 입원 기록지를 작성해서 올려야 하기에 직접 만나야 한다. 보통 3시부터 입원 오는데, 많은 날은 야간 입원을 빼도 20명 가까이 입원 오기도 한다. 인턴 4명이기에 망정이지, 2-3명 이선 어떻게 이 사람들을 다 입원받지? 싶을 때가 많다. 한 명당 평균 4-5명씩 입원받으면 이제 4-5시가 돼있다. 물론 누군가 연차를 나가고, 야간 입원까지 폭발한 날에는 한 명이서 10명 가까이 입원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날 당직은 9-10시쯤에 의국에서 비로소 퇴근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야간 PRN 처치 상황도 있고.


4시 반 즈음에 간호 선생님한테 PRN 주사 명단 연락이 온다. 이 연락을 받으면 이제 '아 하루가 거의 끝나가는구나.' 생각이 든다. 

당직인 경우엔 바로 입원 예약 목록을 확인하고 야간 입원이 더 있는지 확인해본다. 야간 입원이 없어? 이건 무슨 횡잰가. 이 정도면 하나님 천지신명님 세계의 모든 신께 감사하다고 외치고 운이 좋은 날이라는 생각에 하루 종일 쌓였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다. 


당직이 아닌 경우,  6시 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 나가야 하는데~그날 저녁 약속이 있을 수도 있고, 운동하러 가야 할 수도 있고. 무엇이 됐든 가운이랑 스크럽을 벗어던지고 나갈 수 있는 구실이 있다는 거 아닌가.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거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처럼..

6시 땡 하는 순간 저녁OFF 이 5글자를 메신저 상태 메시지에 단단히 새겨주고 메신저 로그아웃을 한다. 이제야 저녁 시작인 것이다. 그렇게 바로 운동을 가기도 하고, 저녁 약속을 나가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등 또 시간은 지나서 10시가 돼있고. 하루가 끝이 난다. 


누군가 연차를 쓴다면 그 사람 몫까지 일을 해야 하는 거고, 사실 이제 익숙해져서 두 명만 남는다고 해도, 이 병원의 환자 절반이 다 내가 관리해야 하는 환자라고 해도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러려면 월급 인상이 돼야겠지만^^ 


이런 생활을 일주일, 한 달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일 년이 쌓여간다. 


어느 점심시간에 한 원장님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인턴 하는 거 후회 안돼요?"

그땐 7월 즈음이었고, 일적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건 없었다. 다만 어떤 환자들이 입원할지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 그때 내 답변은

"지금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ㅎㅎ"

사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이 쉬울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거나, 하루 종일 액팅 하는 것에 큰 불만은 없고 오히려 즐기는 지경에 이르고 있어서 인턴 일이 힘들어서 후회한 적은 없다. 또 전문의가 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기에 인턴, 레지던트는 학교를 가듯이 내가 거쳐야 하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인턴의 의미를 못 찾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다시 인턴을 할 수 있다면? 두 번은 안 할 거다 ㅎㅎ 


#일 년을 마무리하며

레지던트 올라갈 때 면접을 또 본다. 그때 내 장점으로 친화력, 소통능력, 책임감을 꼽았다. 인턴 지원할 때 자소서를 보니 난 도전정신, 주체성, 소통능력을 말했다. 

사람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정신적인 치유가 된다고 믿는다. 

일 년간 병동에서 일하면서 내 담당 환자들 뿐 아니라 내가 입원을 받았거나, 대신 침 치료를 하면서 친분을 쌓은 환자들이 있다. 

사소한 특징이 눈에 잘 보이는 게 예전에는 큰 장점인지 몰랐는데 그 사람이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거나,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거나 하면 바로 눈치채고 얘기해준다. 

인턴 초반에는 동기들이랑 일 얘기하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여서 환자들 문진 하거나 복도에서 만나서 잠깐 수다 떠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나의 탈출구와도 같았다. 


 어떤 환자가 내게 "선생님은 참 애살이 있어요. 원장님한테도 전해줬어요. 그랬더니 원장님이 상기된 표정으로 그러냐고 물어보던데요?" 했더랬다. 

내가 어떻게 그 환자분의 아픔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섬유근육통 환자였고, 그것도 질환을 앓은지도 오래됐는데. 밤마다 아파하면서 진통제 주사를 맞거나 갖고 있던 진통제 약을 먹는다고 할 때마다 더 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원장님 휴진일에 침 치료를 하는데, 섬유근육통과 함께했던 지난날들에 대해 내게 말해주면서 환자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봤다.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며. 


친밀도가 높아지면 치료효과도 높아진다. 똑같은 술기를 하는데 누구는 잘 낫고, 누구는 천천히 낫고. 실제로 치료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변 환경이 지지하는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내가 일종의 정서적 완충지대 같은 역할을 해준 게 아닐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나의 능력은 그렇게 환자 한 명 한 명한테 내 진심과 함께 통했으리라 믿는다. 내가 휴가를 갔다 오면 선생님 쉬고 오셨냐며, 내 행방을 궁금해했다는 환자도 있고, 어느 환자의 마지막 날에 나 대신 다른 선생님이 침 치료를 해준 경우에 그 환자가 꼭 고 선생님한테 너무 감사했다고, 선생님 덕분에 싹 낫는 것 같다고 전해달라던 환자도 있었다. 


운이 좋은 일 년이었고, 병원에서 환자들과 이런저런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너무 특별한 해였다. 내년이 더 기대되고 앞으로 있을 3년 동안 또 얼마나 재밌는 일이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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