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갛고 하얀 당신의 얼굴과 나의 J자 흉터

스물일곱, 간이식

by 아름나무


1.

중환자실에서 하루가 지난 후 일반 병실로 올라왔다. 수술 후 그다음 날은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했지만 그건 마약성 진통제 덕분이었다.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진 후 느껴지는 통증은 어마어마했다. 배를 열고 닫은 수술이니. 배에는 복대가 둘러져 있었고, 한동안은 일어나지도 못했다. 침대의 높낮이만 조절해 앉았다 누웠다 할 뿐. 그때 당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평소에 내 수면자세인 '옆으로 누워서 자는 것'이었다. 통증은 물론이고, 밤에도 간호사들이 돌아다니며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니 잠을 깊이 잘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회복이 조금 더딘 편이었다. 투여한 진통제가 몸에 안 맞아서 발작 비슷한 증상이 온 적도 있었고, 계속 속이 메스껍고 구토를 하기도 했다. 겨우 기운을 차리면서 무언가를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유일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간 음식은 다름 아닌 귤이었다. 그때 한 조각 먹던 귤이 어찌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던지. 아 제일 힘들었던 건 다름 아닌 주삿바늘이었다. 여기저기 찌르고 넣었다가 다시 빼는 주사 바늘이 정말 힘들고 무서울 지경이었다. 수술과 입원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 그전엔 꿈에도 몰랐지. 솔직히 이렇게 힘들고 아픈 건 줄 알았다면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느린 속도여도 몸은 회복을 했다. 일어나고, 조금씩 걷고, 며칠 만에 세수도 해보고. 수술 전에 입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역시나 일상 속 숨어있는 당연한 것들이었다. 옆으로 눕는 것. 걷는 것. 땀을 흘려 운동하는 것.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하나 추가하자면 한낮에 맥주 한 잔 마시는 것도.


밤에 깊이 잠을 못 자니 비교적 병실이 조용한 낮에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다 주치의를 만나면 그는 내게 꼭 이렇게 농담과 진담이 적당히 섞인 말을 건네셨다.


"아니 20대가 이렇게 회복이 느리면 어떡해요~ 좀 많이 움직이고 걸어야 금방 회복하지~ 볼 때마다 누워있는 거 같아 어째~ 나 이런 20대는 처음 보네 또~"


"아니에요 선생님! 저 밤에 복도 나와서 걸어요! 밤에 잠이 안 오고 낮에 졸린 것뿐이에요!"


그러면 농담 하나 툭 덧붙이셨다.


"아니 여기가 미국이에요~? 왜 혼자 다른 시차를 살고 계셔~"


그러면 난 풉 하고 웃곤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 몸은 회복 속도를 더 냈고, 도통 나지 않았던 식욕도 돌아왔다. 여러 개의 주삿바늘은 내 혈관에서 빠져나왔고 외과병동에서 어느새 나일론 환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남은 건 개복 부위 통증뿐 이건 퇴원해서도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2.

아버지는 중환자실 무균실에서 집중 케어를 받다가 외과병동 1인실로 넘어오셨다. 이식 수술 후 면역억제제를 강하게 투여 중이라 다른 환자와 접촉을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보호자와 의료진 모두 아버지가 계신 1인실을 들어갈 때에는 꼼꼼히 소독을 한 후 가운을 입고 들어가야 했다. 어느 정도 기운이 차려지고 나니 아버지의 얼굴이 궁금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잘 된 건가. 병문안을 오셨던 외할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휴 아기 피부가 됐어. 이서방 새 사람 됐네."


똑똑.


수술 후 9일이 지나서야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던 그 순간.


칙칙하고 노랗고 생기가 없던 당신의 얼굴은 외할머니의 말씀처럼 꼭 아기 얼굴 같았다. 말갛고 새하얀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기분이 묘했는데 뭐랄까, 정말 아버지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분명히 죽음의 문턱 가까이에 있었던 거 같은 그가 삶의 세계로 가까이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난 걸 보니 그제야 이 수술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 동안 계속 머리가 아프고 피곤하고 가끔 정신이 이상하고 끙끙 앓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나는 늘 가슴을 졸이고 불안해했는데. 그날 우리는 전혀 그런 불안 속에 있지 않았다. 불안이 사라졌다. 물론 앞으로 더 유심히 건강관리를 해야 하지만.


"큰 딸, 아빠는 이제 괜찮으니까 너 몸 잘 챙겨."


누가 누구 몸을 챙기라고 하는 건지.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3.

"아휴 웬일이야.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아버지 살리겠다고. 너무 대단하다."

어느새 나는 외과병동에서 효녀로 소문이 나 있었다. 서울의 아산병원 같은 곳이야 간이식 수술이 많이 진행되니 흔하겠지만 20대 딸이 아버지에게 간을 주는 수술은 그곳에선 흔한 경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친구들도 몇몇 병문안을 왔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맞이했다. 살아난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난 후는 그저 마음이 편했다. 큰 일을 치렀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버지는 몇 주 더 병실에서 케어를 받아야 했고, 나는 금세 퇴원을 하게 되었다. 간 회복과 관련된 약과 개복 부위 통증을 줄여주는 진통제를 잔뜩 처방받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통증이 있었지만 역시 집이 최고지. 진통제 없이도 낮에는 버틸 수 있었고, 자기 전에 한 알 먹고 자면 깊이 잘 수도 있었다. 몇 주동안 집에만 머물면서 몸에 좋은 음식들을 먹으며 회복에 더 신경 썼다. 가장 편한 장소에 머물면서 점점 통증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네 병원에 들러 수술부위 소독을 계속 받았다.


"아휴, 아버지한테 간을 준거예요? 장하다."


간이식 공여자라는 명함을 본의 아니게 내밀 때마다 이 소리를 많이 들었다. 심지어 수술받은 외과 병동에 외래진료를 받으러 가면 내 이름을 특별하게 불러주셨고, 여하튼 그때마다 기분이 은근히 좋았다.


"예쁜 이ㅇㅇ님~ 아휴 딸내미 너무 예뻐. 들어와요."



4.

"실밥 이제 다 뺐고요. 이제 집에서 샤워해도 돼요."


허리를 감싸던 복대도, 수술부위에 촘촘히 박혀있던 실밥도 다 뺀 후 드디어 샤워를 할 수 있게 되던 날. 그동안 씻지 못해 너무 답답했다. 와 이제 씻을 수 있다니! 개운한 마음으로 욕실에 들어가 옷을 다 벗고 거울 속 나, 나의 몸을 바라보았다. 수술 후 처음으로.


배의 중간부터 오른쪽으로 깊이 새겨진 J자 흉터.


수술 흉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고, 나는 많이 놀랐다. 게다가 살성이 좋지 않아서 수술 흉터가 깔끔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없어지지 않을 이 흉터를 품은 채 내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 목욕탕이나 수영장은 어떻게 가지. 비키니를 입을 수 있을까?'


충격이라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로 아무에게도 이 감정을 쉽게 말하지 않았다. 쏟아놓으면 눈물이 쏟아지면서 내가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할 거 같아서. 훈장이라고 생각하라고. 넌 대단한 일을 한 거라고. 그 흉터를 자랑스러워하라고.


부끄럽지만 그 큰 일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흉터가 지금도 자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조금 부끄럽다.


그때 내 나이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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