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빛났지만 가장 슬펐던 계절 1

나는 유럽의 여름을 완벽하게 즐기지 못했다.

by 아름나무


1.


조금 다른 곳에서 나답게 살아보기.


엄마의 그 말은 내 런던 워홀 기간 동안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 문장처럼 살아보자고 다짐할 때, 마침 내가 런던에 온 지 딱 1년이 되는 시기였고, 게다가 하염없이 즐기고 싶은 여름도 찾아왔던 6월이었다. 심기일전하기 딱 좋은 때였다.


'그래도 어떻게 1년 동안 적응하면서 이곳에서 살았네.' 나는 수고한 내게 건네는 선물이자, 앞으로의 1년은 더 잘해보자는 의미로 집 근처 Gym을 등록했다. 그건 한참을 등록할까 말까 고민하기만 했던 수영, 피트니스 프로그램, 헬스장을 모두 다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이었다.


나 자신을 언제 괴롭혔냐는 듯 나는 다시 설레었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란 늘 그런 법이다. 게다가 런던의 여름이란. 한 가지 더. 나는 잠시 이 여름을 무작정 즐기자고 다짐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여름이야. 서머타임이 끝나기 전까지 즐겨야 해. 이건 무조건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즐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야 다시 길고 질긴 슬럼프를 겪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다시 그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엔 나의 시간이 아까웠으니까.


그 여름, 어쨌든 나는 막 즐겁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수영도, 길고 쨍한 햇빛에 가벼운 발걸음도, 즐겨 마셨던 차가운 맥주와 납작 복숭아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펍에서의 시간도. 애써 즐기려던 모양새도 어느새 힘을 빼고 즐길 수 있을 만큼, 런던의 여름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빛났다. 그리고 어느새 나의 목표는 '이 곳의 여름 즐기기'가 되어버렸다.




2.


"우리 무조건 여행 가자. 이번 휴가 어디로 갈까?"


리아와 나는 이 여름을 즐기지 못해 안달 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름휴가를 계획했고, 가난한 우리가 결국 가기로 정한 곳은 비행기 값이 가장 싼 코펜하겐(덴마크의 수도.)이었다. 그것도 극성수기를 겨우겨우 피해 8월 말.


"야 그래도 코펜하겐은 비행기 값이 싸서 다행이다. 그렇지?"


우리의 계획은 완벽했다. 그래, 여름을 런던에서 즐기고 그 마무리는 코펜하겐 여행인 거야! 여기서 또 욕심은 피어나지. 더 즐겨야 해 이 여름! 조급했던 나는 BBC 프롬즈 예약도 해놓았다.


그리고 게다가 7월은 바로 윔블던 테니스 대회 시즌. 가만히 있으래야 있을 수 없을 만큼 동네는 관광객으로 북적였고, 평소보다 더 활기찼다. 내가 잠시 머무는 이곳이 하필 세계 대회가 열리는 곳이라니. 이건 정말 행운이었다. 큰 스크린을 걸 수 있는 곳마다 스크린으로 테니스 생중계를 볼 수 있었고, 어느 펍이든 들어가는 곳마다 대회를 보는 관중들로 북적였다. 그 여름의 그 시즌은 윔블던에서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이었고 나는 어느새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더! 더! 더 즐겨야 해. 나는 더 즐겨야만 해! 지금 이곳을 누리자는 다짐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욕심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여름 끝자락 코펜하겐 여행까지 즐겨야 마침내 만족이 될 것 같던 그 욕심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3.


<언니, 보고 싶어.>


동생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처음으로 알아차렸던 건 부모님도 아니고 저 멀리 시차가 8시간이나 차이나는 곳에 있던 나였다. 갑자기 동생이 아팠고, 저 메시지를 끝으로 동생은 병원으로 들어갔다. 아주 정말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예고 없이 닥친 일이었다. 동생은 아주 많이 아팠고, 급기야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계속 있어야만 했다. 그 누구도, 의사 선생님조차도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야 할 것 같아. 거기 바로 정리하고 들어올 수 있어?>


<집도 그렇고 다 정리하려면 짧아도 한 달은 걸릴 것 같아. 어떡하지 엄마?>


<그러면 그냥 잠깐 들어와.>


<응.>



런던에 있는 동안 한국에 갈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나는 이 런던의 여름을 즐기다가 8월 말엔 코펜하겐에 가려고 했는데. 내가 무슨 큰 욕심 낸 건가? 왜 도대체 왜 내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쉽게 안 풀리는 것 같지? 얘는 왜 갑자기 아픈 거야. 왜 나를 가만두지 않는 거야.'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걸으며 울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그것도 심하게 아프다는 건 그런 거였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전혀 상상조차 못 했는데. 런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는 것뿐이었고, 화면 속 그와 그녀, 그리고 화면 바깥의 나는 그저 말없이 울기만 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한국에 가야 했다.



"도로시, 무슨 일 있어? 너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나 급히 한국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동생이 많이 아파.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일단 최대한 길게 낼 수 있는 휴가는 2주야. 잘 해결되길 바랄게."



7월 말. 모든 여행지가 극성수기. 일주일 전. 왕복 120만 원의 비행기를 끊어 나는 갑자기 한국에 들어갔다.




귀국 후 동생의 휴학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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