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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21. 2020

지진

두두두두두. 땅이 흔들렸다. 조그마한 돌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두두두두두. 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내 앞으로 돌들이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 이상한데?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낀다.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뛰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진동은 계속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뛰는 일 밖에 없었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뛰었다. 앞으로, 죽어라 뛰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대학 졸업 기념으로 무언가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우연히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중 누군가 sns에 올린 히말라야 사진을 발견했다. 순간 눈이 번뜩 뜨였고, 그 자리에서 졸업 여행지로 히말라야를 선택했다. 뜬금없이 히말라야라니. 등산해봤냐고? 응~ 아니. 내게 등산이란 뭐랄까. 음. 다시 내려올 거 왜 올라가?라는 느낌이었달까. 그러나 나는 이미 히말라야의 정령에 취해버렸는지, 그대로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끊어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메일에 도착해 있는 보딩패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인간의 표본이다. 히말라야를 왜 때문에 가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재밌어 보여서, 가 될 수 있겠다. 내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는 데 주를 이루는 요소는 재미다. 재미. 재미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고로, 사진에서 보였던 뾰족하고 새하얀 눈에 덮인 삼각형 모양의 히말라야 산맥은 내게 재미와 흥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비행기 탑승일은 일주일 뒤였다. 나는 선지름, 후조치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먼저 지르고, 그다음 수습한다. 네팔행 비행기를 질렀으므로 이제 수습을 할 차례였다. 히말라야에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았다. 별 거 없었다. 경량 패딩, 바람막이, 트레킹 폴, 아이젠, 등산화, 그밖에 몇 개의 옷가지들. 트레킹 폴이나 아이젠, 등산화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등산의 등도 모르는 내가 이런 걸 가지고 있을 줄이야. 조금 더 찾아보니 카트만두에서 빌릴 수가 있단다. 역시. 길이 있는 곳에 뜻은 어디에나 있어! 읭?ㅋ 어쨌든 전부 빌릴 수 있다고 하니, 내가 챙겼던 건 아이패드(읭?)와 청바지(읭?), 브이넥 셔츠(읭?)와 같은 등산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품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랐다.


카트만두의 뿌연 먼지들이 나를 반겼다. 세상이 온통 황토색이었다. 스카프로 입을 가리지 않고는 다닐 수 없는 도시였다. 마치 모래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보였다. 공항에서 카트만두 중심지로 이동했고, 숙소로 들어가니 그나마 괜찮았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으러 여행사로 향했다. 여행사는 내게 포카라라는 도시로 가라고 했다. 그때 여행사에서 발견한 사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산이 어디냐고 물으니, 에베레스트라고 했다. 에베레스트?


에. 베. 레. 스. 트? 


내가 아는 그 에베레스트가 맞냐고 물어보니 맞단다. 뭘 그렇게 놀라냐는 눈빛으로. 나는 일반인도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 있는지 물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이나,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칼라파타르까진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히말라야라는 의미는 동일하지만, 조금 더 엣지있어 보이는 에베레스트를 택할 것인가, 아님 기존에 생각했던 안나푸르나를 택할 것인가.


나는 허세 가득한 관종이었다. 남자라면! 에베레스트 한 번쯤! 어? 가 줘야지!라는 말 같지도 않은 허세로 안나푸르나로 가려했던 계획을 바꿔 에베레스트로 정했다. 말로만 듣던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 일반인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꼭대기 까지는 아니지만) 등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흥분됐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기 위해선 퍼밋도 받아야 하고,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를 또 한 번 타고 루클라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전 출발하는 마을이 있는 공항이다. 말인즉슨 비행기 값 300불과 퍼밋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비행기 표를 사고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빌리는 둥 이런저런 절차를 마치고 카트만두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눈에 띈 것은 한 무리의 한국인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 단체로 EBC(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를 온 듯 보였다. 초보였던 나는 조용히 구석에서 탑승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가 루클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빛났다. 


카트만두를 떠난 비행기는 안전하게 루클라 공항에 도착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등산객들이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져나와 산에 오를 채비를 했다. 루클라에 같이 내린 한 무리의 아저씨 아줌마들은, '줌마 탐험대'라는 이름의 등산 팀이었다. 아줌마들이 주 멤버여서 줌마 탐험대고, 대장과 사무장, 위원장님은 남자였다. 탐험대를 이끌고 오신 대장님은 혼자 이곳에 온 청년이 대견하다며 무슨 일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연락처를 주시고 떠나셨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나는 내 길을 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루클라 마을은 2800m에 위치해 있었고, 팍딩(2600m)을 지나 남체(3400m)까지 오르는 게 첫날 목표였다. 600m 올라가는 게 그다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잡은 계획이었는데, 오며 가며 만난 캐나다인 친구 제프리가 고산에 적응하면서 천천히 가는 게 나을 거라며 자기와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혼자 가는 게 심심하기도 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올다. 팍딩에서 하루를 묵고, 이틀째 되는 날 남체에 올랐다. 남체 마을 숙소에 도착해서 부엌에 가보니 첫날 만난 줌마탐험대 분들이 요리를 하고 계셨다. 어머님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대장님이 내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해주셔서 그들 틈에 껴 저녁을 함께했다. 대장님은 내게 혼자 오르면 심심하고,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감사하긴 하지만 민폐일 것 같아 괜찮다고 했는데, 어머님들도 같이 가자고 하셨다. 내일까지 생각해보고 말씀드린다고 했다. 같이 갈 거면 다음 날 아침 7시에 나오고, 아니면 나중에 다시 뵙겠다고 했다.



남체(3440m)


다음 날 오전 7시, 사람들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분들과 같이 가지 않았고, 남체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 고산 적응을 해야 하기도 했고 남체란 마을을 둘러보고 싶기도 했다. 히말라야의 마을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꺼먼 잿가루를 얼굴에 묻힌 네팔의 귀여운 아이들이 내 앞을 뛰어다녔다. 공기는 맑았고, 네팔 특유의 향내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밤이 되자 별들은 모습을 드러냈고 선선한 바람은 내 몸을 휘감았다. 남체까지 도착했다는 사진과 글을 SNS에 남기고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있을 산행은 왠지 모르게 더 기대되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텡보체(3860m)까지 간다. 길을 출발한 지 두 시간째, 생각보다 힘들다. 헉헉 거리며 산 허리를 돈다. 주위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다. 위치는 3650m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땅이 흔들린다. 조그마한 돌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두두두두두. 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내 앞으로 돌들이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한다. 어.. 이상한데?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낀다.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뛰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굉음이 들린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린다. 진동은 계속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뛰는 일 밖에 없었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뛰었다. 앞으로, 죽어라 뛰었다.





그리고 멈췄다. 2분 정도 되었을까? 3분? 그 짧은 시간이 마치 20-30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헉헉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게 뭘까? 지진일까? 무서웠다. 주위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일어났다. 사람을 찾아야 했다. 혼자 있기엔 위험했다. 혹여나 또 땅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걸었다. 1시간 정도를 걸으니 롯지가 나왔다. 큰 롯지, 작은 롯지들이 있었는데 작은 롯지 몇 개가 폭삭 무너져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그나마 멀쩡했던 큰 롯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외국인 트레커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던지라 배가 몹시 고팠다. 점심으로 양차우 프라이드 라이스를 시키고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에게 물었다.


- 아까 뭐였어요? 지진?

- 응 맞아. 엄청 큰 지진이었어. 우린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낙석들이 떨어지고 지진이 나서 다시 되돌아왔어

- 엄청 컸나 보네요. 옆에 롯지들이 무너졌어요

- 응. 너도 조심해.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불안했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안되는데. 곧이어 양차우 프라이드 라이스가 나왔다. 맛있겠다. 그 와중에 엄청 배가 고팠다. 한 입 먹으려는데 유럽에서 온 듯한 젊은 여자가 내게 말을 건다.


- 안녕, 너 혼자 왔니?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상태에서 밥을 넣다 말고 그 여자애를 쳐다봤다. 그리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 여자애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갑자기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롯지 전체가 크게 흔들린다. 네팔 아저씨가 갑자기 롯지 문을 열고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모두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뛰쳐나간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우리가 있던 롯지의 기둥이 무너지면서 한쪽 면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쪽도 무너지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휘날렸다. 우리 앞에 박혀있던 10m는 족히 돼 보이는 커다란 돌이 흔들흔들 움직였다. 네팔 아주머니들은 공터에 나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히말라야 신에게 부르짖는다. 더 크게 부르짖는다. 나도, 세계 각지에서 온 트레커들도 길이 난 곳 양 옆으로 뛰어다녔다. 어디로 돌이 떨어질지 몰라 무조건 하늘을 보며 뛰어다녔다. 얼굴은 사색이 됐다. 저 위에서 주먹만 한 돌들이 떨어진다. 땅이 계속 흔들리고 어디선가 자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서로 뛰어다니다가 부딪힌다. 넘어진 손을 잡고 일으킬 여유 따윈 없다. 각자의 생존만 있을 뿐.





이윽고 굉음이 멈추고, 흔들리던 땅과 큰 돌의 움직임도 멈췄다. 우리의 긴장도 한순간 지나간 듯 보이지만, 미세한 떨림은 손 끝부터 발 끝까지 계속됐다. 다리는 후들후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심장이 쿵쿵 쿵쿵 터질 것만 같다. 동공의 움직임은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내려왔다가, 양 옆을 잽싸게 훑어보기에 바쁘다. 대자연의 진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네팔 아주머니들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울며 기도했다. 롯지들은 몽땅 부서지고, 돌에 맞은 네팔 사람 하나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누워있다. 죽진 않았다. 여성 트레커 한 명이 울기 시작한다. 나 또한 울어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이게 과연 뭐란 말인가?


우리 모두는 30분을 긴장한 채 넓은 공터에서 하늘을 보고 서있었다. 언제 또 지진이 날지 모르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30분이 지났다. 다음 스텝이 중요했다. 앞으로 가느냐. 물러서느냐. 많은 트레커들이 그룹을 지어 내려간다고 했다. 내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고작 3600m 정도 오려고 이 곳에 온 게 아니었다. 지금 내려가는 건 후회만 남을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각국의 트레커들은 옆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려가자. 내려가야만 해. 더 이상 올라가면 죽을 거야. 몇몇 그룹이 생겼다. 한 트레커가 내게 다가온다.


- 넌 어떻게 할 거니? 내려갈 거면 우리랑 같이 가자

- 고맙지만 나는 조금 더 올라가 보려고

- ??? 너 그러다 진짜 죽어

- 위험한 건 알겠는데 여기서 포기하고 싶진 않아

- ... 그래 알았어. 조심해. 행운을 빌게


패기였을까 객기였을까. 20대 젊은 청춘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믿음은 어디서 나온 허세였을까. 나는 내려가는 트레커들을 뒤로하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을 뒤로한 채 홀로 올라가는 기분은 정말 이상했다. 죽을 수도 있을까? 그래, 죽을 수도 있지. 근데 난 이 결정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결정을 내린 거니까. 나는 후회 없는 결정을 하고 싶었다. 3650m에서 하산한다는 건 후회를 남기기에 충분한 결정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산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주변은 고요하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앞뒤로 여러 트레커들과 마주쳤을 텐데 지진이 난 후여서 그런지 어떤 사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곳곳에 쏟아진 돌무더기들이 작은 탑을 이루고 있다. 유실된 길이 많았다. 하늘에선 헬리콥터들이 웅웅 거리며 날아다녔다. 아마도 부상자나 사상자를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계속 올랐고, 무너진 길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더뎠다. 지진이 난 후 다시 출발했던 시간은 대략 오후 3시였다. 오후 5시가 되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은 안개로 둘러싸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몸과 가방이 비에 젖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비가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싸구려 장갑은 엄지 손가락에 구멍이 났다. 엄지는 보호받지 못하고 벌벌 떤다. 싸구려 등산화에도 사부작 밟힌 눈들이 노크도 없이 침투하기 시작한다. 발이 젖기 시작했다. 눈은 온 세상을 새하얀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지진이 아니었다면 아마 황홀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날은 정말 추웠다. 꾸역꾸역, 한걸음 한 걸음씩 올라갔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이윽고 내 앞에 양갈래 길이 나왔다. EBC에 오르기 전 고산병을 조심하라는 말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말은 길을 잃는 경우에 대한 것이었다. 가이드 없이 혼자 산을 오를 때, 양갈래 길이 나면 무조건 멈추고 사람을 기다린 후 올라가라고 했다. 잘못된 길로 들어가 그대로 영영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길을 만난 듯했다.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망설여졌다. 혹여나 아닐 경우를 생각해야 했다. 나는 주저했고, 길 가운데 앉아서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눈과 비가 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방과 비니, 패딩이 점점 더 젖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니 추위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Is there anybody here? help me! 크게 외쳤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휘날리는 비와 눈, 바람소리뿐이었다. 다시 앉아 사람을 기다렸다. 괜히 올라온 걸까? 역시 객기였을 뿐이었나? 사람이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발이 더 거세졌다. 다시 일어나 외쳤다. Is there anybody here!!!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윽고 사람을 기다린 지 40분째, 투다다닥, 어떤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껏 기대하는 마음으로 누가 올라오는지 살폈다. 빨간 천을 두른 수도승이었다. 나이는 40대 정도 돼 보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 사람을 봤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고맙다고 했다. 수도승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뭐가?


나는 길을 물었다. 수도승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너무 빨리 올라갔다. 뒤쫓아가기에도 벅찼다. 한 시간여를 더 올라가니 마을로 보이는 평지가 보였다. 그러나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해준 건 폭삭 무너진 롯지였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폭삭 무너져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거대한 수도원 같은 것이 보였는데 절반이 통째로 부서져있었다. 절반은 그나마 모양을 갖춰있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수도승과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는 바디랭귀지를 하며 트레커들, 여행자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수도승은 멀뚱멀뚱 서서 듣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어딘가로 뛰어갔다. 이윽고 5명의 수도승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 중 그나마 영어가 되는 수도승이 있었고, 나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트레커들은 다 떠났다고 말했다. 지진이 나서 다들 내려갔는데 너는 왜 올라왔냐고 묻는다. 말이 안 나왔다. 그저 나 같은 여행자들을 보고 싶었다. 좌절했고, 주저앉았다. 수도승은 트레커들을 만나려면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마을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수도승들과 같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안심이 더 될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일어나 수도승이 알려준 방향으로 길을 옮겼다. 30분쯤 더 갔을까, 넓은 평지 가운데 조그마한 파란색 롯지가 보인다. 벌써 날은 어두워졌다. 나는 저곳에 사람이 있기를 바라면서 문을 두드렸다.


- 쾅쾅쾅, 누구 계세요?

- 누구세요?


네팔 사람이 나온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 어.. 저기 혹시 여기 롯지인가요? 트레커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는데요

- 아, 네 맞아요. 롯지에요. 들어와요. 지금 올라온 거예요?

- 네 방금 도착했어요

- 지진이 났는데 올라왔다고요?

- 네.. 그런 셈이죠

- 미쳤군요 하하


나는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에는 큰 난로가 하나 있었고, 주위로 트레커들 열댓 명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간은 저녁 8시. 내가 들어가니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나는 울먹이는 소리로 드디어 트레커들을 찾았다며 여기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은 크게 웃었고, 박수를 쳐줬다. 지진이 난 후에 올라온 거야? 얼마나 걸렸어? 어디서 올라왔어? 오는 길은 괜찮았어? 무섭지 않았니? 대단하다. 미쳤다. 죽을뻔했어 너, 등등 수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는 하나하나 대답을 하고 난로 옆에 앉았다. 따듯한 마늘 수프 한잔을 시키고, 난로에 몸을 녹였다. 옆에 있는 트레커들과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니 마음이 편해졌다. 안정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숨이 갑자기 가빠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토할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갔다. 호흡이 짧아졌다. 숨쉬기가 조금 힘들다. 토할 것 같은 메슥거림이 계속됐다. 일어나 화장실을 가 구토를 했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힘이 들었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 듯 보였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초점이 흐려졌다. 허공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뜨고, 핸드폰의 가족사진과 가지고 온 미니 성경책을 봤다. 살아야 해. 아프면 안 돼. 죽으면 안 되지.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지진의 트라우마와 후유증, 고산병 증세가 같이 나타난 듯 보였다.


내 앞으로 스위스 여자가 앉았다.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 어질 거리고 토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따듯한 마늘 수프를 하나 더 시켜줬다. 내 상태가 조금 이상한 걸 알고 온 것 같았다. 내게 어디서 왔고, 어쩌다 트레킹을 시작했고, 무슨 일을 했는지 묻기 시작한다. 증상이 아주 심각한 건 아니었어서 하나하나 대답을 해줬다. 정신없이 얘기를 하다 보니 매슥거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금세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니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스위스 여자는 같이 온 동료들을 소개해줬다. 그때 누군가가 롯지 문을 열고 외쳤다. 모두들 밖으로 나와봐! 빨리빨리! 또다시 긴장감에 휩싸인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지? 하며 모두들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갔을 때, 우리는 바로 앞에 놓인 광경에 입을 벌리고 넋을 잃고 말았다. 그곳엔 아마다블람이라 불리는 산이 눈 앞에 떡하니 마주하고 있었다. 청명한 새벽 공기에 어울리는 수많은 별들, 그 사이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설산은 우리 모두를 압도시켰다. 아무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대자연의 황홀한 자태에 깊이 빠져들었을 뿐.



Mt. Amadablam

https://500px.com/p/ivan_kozorezov?view=photos



지진이 난 후 마을은 안개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마다블람은 그 멋진 자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모두 다시 롯지로 들어왔고, 트레커들 하나하나 방을 배정받았다. 자리가 부족해 모두가 방을 쉐어해야 했고, 어떤 트레커들은 홀과 주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는 영국인 케인과 함께 자기로 했다. 모두가 잠에 빠져들었을 무렵, 땅이 다시 흔들렸다. 다시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케인은 소리를 질러 나를 깨웠고 나는 지진을 감지했다. 빠른 속도로 뛰쳐나갔다. 모두 공터에 나와있었다. 다행히 큰 지진은 아니었고, 여진이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새벽 한가운데 수많은 별빛이 우리를 총총 비추던 시간, 멋진 아마다블람의 자태 앞에서 우린 한없이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30분을 덜덜 떨며 기다린 후 다시 롯지로 들어갔다. 어떤 트레커는 불안하다며 홀에서 밤을 새운다고 했다. 나는 몹시 피곤했고, 금세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다음 날 느지막한 아침, 케인은 벌써 떠나고 없었고 주인이 밤에 괜찮았냐고 물었다. 나는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 잤다고 말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여진이 몇 번 더 일어났다고 했다. 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아주 잘 잤다고 말해 모두가 웃었다.


홀에 나와보니 새로운 사람이 몇 있었다. 설마 밑에서 올라온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고, 더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위의 롯지들 대부분이 부서졌고, 많은 트레커들이 하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존재하는 롯지도 목표치에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는 사람들로 꽉 차있어서 올라가 봤자 잘 곳도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롯지에 묵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하산 준비를 했다. 어제와 달리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이대로 포기하는 게 몹시 아쉽긴 했지만 어제 겪은 고산병과 지진의 후유증, 전반적인 롯지들의 상태를 봤을 때 내려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 근육이 아파왔다. 지진을 피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근육이 놀란 듯싶었다. 두 시간쯤 내려갔을까, 저 멀리 롯지 하나가 보였고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루클라 공항과 남체에서 만났던 줌마탐험대의 사무장님이다.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사무장님은 나를 보더니 괜찮냐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 다친데 없냐고. 다리는 왜 절뚝이냐고 물었다. 이윽고 다른 줌마탐험대 어머니들과 대장님, 위원장님이 나오신다. 내가 연락이 안돼 걱정을 하고 계셨다고 했다. 대장님은 나를 혼자 보낸 것이 내키지 않았다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들과 대장님은 내 다리를 치료해주셨고, 점심을 먹고 다시 하산을 했다. 어머니 한 분이 내게 물었다.


- 가족한테 연락은 했니?

- 아뇨, 아무것도 안 터져서 못했어요

- 걱정하시겠는데, 이거 사용해서 얼른 연락드려


부모님께 문자를 드렸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나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어떤 난리가 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줌마탐험대와 나는 루클라 마을까지 천천히 함께했다. 하산하는 동안 여진이 계속 났다. 새벽에 자다가 뛰쳐나오고, 걷다가 멈추고 피신하고, 공터에 멍하니 앉아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지진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여진의 효과는 우리를 점점 패닉에 빠트렸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하늘에서는 더 많은 헬기들이 주야장천 떠다녔다. 헬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 롯지 주인은 EBC에서만 적어도 20명 이상이 죽었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고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 피부 위에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있었다.  


한 번은 새벽녘에 또 여진이 났다. 우리는 자다 말고 뛰쳐나갔다. 넓은 공터에서 별을 바라보며 긴장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외국인 트레커 한 명이 롯지 주인에게 물었다.


- 술 있나요?

- 술 있죠. 근데 갑자기 왜요?

- 지금 이런 상황에 이렇게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하면 무섭기만 할 거예요. 차라리 마시려고요. 다 같이 마시죠


이런 상황에 술을 마신다고? 미친 거 아냐?라고 생각한 나와는 달리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생겨나기 시작했다.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지쳐있었다. 그래, 차라리 마시자. 두려움을 없애자! 뭐가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음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했다. 난과 짜파티, 신라면, 커리, 탄두리, 프라이드 라이스와 맥주가 나왔다. 우리는 먹고 마셨다. 흥이 돋았다. 가운데에 조그마한 장작불을 펴놓고 주위를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덴마크어, 독어, 각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고 힘껏 껴안는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을 거라고 말해준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두려움의 불꽃을 우리 모두가 밖으로 꺼내 놓았을 때 우리는 그 두려움을 마주한다. 혼자라면 어렵겠지만, 우리 다 같이 함께 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더 세게 껴안았고, 더 과장되게 춤을 췄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히말라야 새벽녘에 떠오른 초승달은 덤덤히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공항이 있는 루클라 마을에 도착했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먼저 카트만두로 돌아가야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하루 이틀 내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숙소를 잡았고, 대장님과 나는 카트만두와 루클라 공항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녔다. 넓은 공터에서는 헬기가 착륙해있고, 그 옆으로 죽은 시신들이 가죽천에 둘러싸여 누워있다. 얼핏 봐도 10명이 넘어 보였다. 카트만두 상황을 들어보니 훨씬 심각했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져 100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했다. 루클라 공항에는 카트만두로 돌아가려는 세계 각국의 트레커들로 꽉 차있다. 인도는 전용기를 띄워 자국민들을 태워간다고 했다. 호주도 자국민을 데려가 우선 태국에다 내려놓는다고 했다. 캐나다도, 미국도 전용기를 띄워 자국민을 태워갔다.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기다리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웃긴 해프닝이 있었다. 내가 루클라 마을에 도착하고 와이파이를 켜보니 핸드폰에 불이 날 정도로 많은 카카오톡 메시지와, 페이스북 메시지, Whatsapp 메시지가 와 있었다. 타임라인에 올려놓은 사진과 내 페이지 또한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괜찮냐고, 살아있냐고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니, 며칠 째 연락이 끊긴 나를 부모님은 외교부에 실종신고를 하셨고 외교부는 페이스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을 가져다가 아침저녁 뉴스로 내보낸 것이었다. '홀로 네팔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던 25살 조르바 씨가 실종을 당했습니다'로 시작하는 앵커의 말은 나를 무사히 찾았다는 말과 우리 아빠의 인터뷰, 네팔 현지 상황에 관한 내용을 내보내고 있었다. 아침, 저녁을 먹다 말고 뉴스에서 내 얼굴을 본 친구들은 초등학교 동창부터 중고등, 대학교 친구들까지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들은 여러 방편으로 내 위치를 알아보다가 에베레스트로 떠나기 전 나와 함께 있었던 콜롬비아 커플에게까지 연락을 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내가 무사한지 알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뉴스에 나온 사진(왼), 지진 후 하산해서 찍은 사진(오)



뉴스에 나왔다는 이유로 외교부는 나를 찾기 시작했다. 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무사한지, 지금 나와 같이 있는지 물었고, 무사하다는 답변을 듣자 다행이라고 하며 '잘 챙겨서 귀국하라'라고 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루클라 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했다. 전용기가 언제 올지 알 수 없고, 기다리라는 답변만 들었다. 그동안 다른 나라의 국민들은 각각의 전용기를 타고 먼저 나갔다. 대기한 지 첫째 날, 미군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고, 어떤 것이든 어려움이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라고 했다.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기에, 너희를 위해 이곳에 있기도 하다고 말을 해줬다. 립서비스라고 해도 고마웠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미군은 바로 루클라로 날아왔고 자국민들을 챙겼다. 우리는 정부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 대기하고 기다리다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다른 국민들이 다 떠나고 난 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






루클라 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를 하다 드디어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네팔 전역에는 만 명 이상이 죽었고,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했다. 가는 내내 긴장감이 돌았고, 공항에 도착해 각자 일정대로 흩어졌다. 숙소로 가는 길에서 본 카트만두 시내는 처참했다. 많은 건물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고, 그나마 괜찮았던 건물은 길게 금이 가 있었다. 공사장 같은 현장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허공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눈에 박혔다. 부모를 잃은 건지, 잠시 부모가 어디로 간 건지, 먼지를 뒤집어쓴 꼬마 아이들끼리 밖으로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3일가량을 지낸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한국 공항에 도착하니 줌마탐험대 대장님이 나를 부른다. 지금 밖에 나가면 기자들이 쫙 깔려있어. 네가 제일 먼저 앞장서서 나갈 거야. 옷 깔끔하게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신발도 슬리퍼 말고 운동화 없니? 좀 갈아 신어. 나는 네팔에 갈 때 쪼리를 신고 갔다. 대장님은 기자들이 와 있으니 맨 앞에 선 내가 멀끔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결국 사무장님을 불러 나와 신발을 바꿔 신게 했다. 나는 사무장님의 운동화를, 사무장님은 초록색 쪼리를 신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를 필두로 뒤에는 줌마탐험대의 리더십과 팀원들이 줄을 서게 되었다. 이윽고 공항 게이트 문이 열리고 밖으로 고개를 빼꼼 디밀며 발을 내딛는 순간, 수많은 플래시 세례가 터지기 시작했다. 나로선 처음 받아보는 플래시 세례가 당황스러웠고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했다. 플래시의 빛은 내가 서있던 공간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꿔주었다. 잠시나마 우주대스타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도 잠시, 대장님은 내게 뭐하냐며 등짝 스매싱을 날리셨고, 앞으로 계속 가라고 말하셨다. 나는 걸음을 이어 나갔다. 기자들이 내게 몰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어쩌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게 된 건가요? 혼자 가신 건가요? 지진이 났을 때 어떠셨나요? 혼자 계셨나요? 등. 연예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 연예인들은 이런 느낌으로 인생을 사는구나. 좋구나. 부러워라. 나뿐만 아니라 대장님을 비롯한 팀원분들도 인터뷰를 하시고, 꽃다발을 받았다. 나도 내가 왜 꽃다발을 받는진 모르겠지만, 받으니 기분은 좋다. 경기도지사가 보냈다고 했다.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고, 마중 나온 가족을 껴안는다.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던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드린다. 힘든 시간 동안 나를 아들처럼 챙겨주셨던 줌마탐험대의 어머니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대장님과 사무장님, 위원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언젠가 연이 닿는다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인사를 하고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났다.


히말라야의 지진은 내게 겸손을 알려줬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인생이라고 해봐야 자연 앞에서는 한낱 연약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 앞에 결코 오만해질 수 없다고. 어떤 자연 속으로 들어가든,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히말라야의 새벽 공기가 다시 그리워지는 날이다. 언젠가 또 떠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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