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냥이 Sep 11. 2022

오후 2시, 충무로 2번 출구에서 만나요.

스페인책방


오월의 남산_스페인책방(2022.5)


5층이지만 603호, 스페인책방


이게 최선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기가 막힌 봄날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스페인 원서와 여행책들이 가득하고, 창밖으로 N서울타워가 보이는, 5층이지만 603호인 ‘스페인 책방’. 먼저 경복궁역에 들러 평소 가보고 싶었던 서점들을 둘러보았는데도 스페인서점은 오후 2시 오픈이기에 충무로역에 도착해서도 1시간가량 주변을 배회했다.(남산 한옥마을이 바로 근처에 있으니 코스로 둘러봐도 좋을 듯하다)

그렇게 기다리던 2시가 되고 건물 5층에 위치한 스페인 책방에 도착했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조금 기다려보다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지금 가고 있다며 단골도 아닌 내게 갑자기 도어록 비번을 알려주신다. 나는 그렇게 처음 가보는 책방의 오픈 조가 되어 아무도 없는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의 출근 후에야, 나는 불도 켜지 않고, 커튼도 걷지 않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정적인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남미 음악이 이국적인 서점 풍경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창밖으로 N서울타워와 한옥 기와들이 보인다. 이곳, 갬성 한도 초과다.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스페인이었다.

4년쯤 다녔던 첫 직장에 사표를 냈다. 회사에 뭐라도 이유를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일단 말을 꺼냈으니 선택한 해외 여행지가 그 당시 가장 궁금했던 스페인이었다.

종교적인 신념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좋아서도 아니었고, 당시엔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스페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당시 파울로 코엘료에 빠져있었고, 그의 책마다 등장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너무나 궁금해서였다.

800km의 길 위에서 펼쳐질 일들이 궁금했다. 그곳에서 나의 인생 2막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막상 걷게 되면 인생에 대해 근원론적 질문을 던질 시간은 없고, 오늘 어디서 자는가, 오늘 저녁은 뭘 먹나 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당시 나왔던 산티아고 관련 책과 가이드북은 거의 다 읽어보았다. 그렇게 줄이기 힘들다는 배낭 무게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여서 5.5kg으로 만드는 신공도 보였다.

그 길을 걸으며, 어떤 날은 마음 맞는 새 친구를 사귀어서 웃었고, 어떤 날은 너무 외로워서 울었고, 어떤 날은 술에 취해 걸었다. 거의 매일 맥주와 와인을 마시고 기름진 식사를 했고, 그 덕에 800km를 걸었음에도 살이 1g도 안 빠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딱히 좋아해서 갔던 스페인은 아니었지만, 걷다 보니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스페인.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마을은 800km의 행군 여행이 끝나고 3일간 머물렀던 땅끝마을 피니스테라였다.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고, 이제 다 끝났구나 라는 생각에 온 몸의 긴장이 풀려서 이틀을 고열과 몸살에 시달렸다. 여기서 살아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호되게 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혼자가 되어 바라봤던 피니스테라의 바닷가가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여행 이후로 다시 스페인을 여행한 적은 없지만, 그 때 길 위에서 만났던 인연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그 길 위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요리들을 만들어보곤 한다.

내가 잊고 있었던, 혹은 짧은 여행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스페인이라는 나라.

스페인책방에서 그 추억을 다시 한번 마주한다.



스페인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일단, 오후 2시 충무로역 2번 출구에서 만나요.



스페인책방-서울 중구 퇴계로36길 29 기남빌딩 5층 603호
이전 13화 명일동 주택가 골목 책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