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seIssue Apr 11. 2021

드라마를 못 보겠다.

  딱 1년 전쯤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에 나왔던 배우 조정석님은 당시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TV만 틀었다 하면 각종 CF에 등장했었고, 라디오에서는 드라마 OST도 많이 흘러나왔던 게 기억난다. 그 드라마를 연출했던 신원호 PD의 작품을 나 역시 많이 좋아했다. 수많은 이를 남편 찾기에 몰두하게 했던 응답 하라 시리즈는 물론이고, 바로 전 연출작인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너무도 재밌게 봤었다.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 역시 큰 기대를 가지고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몇 화 가지 못하고, 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드라마가 재미없었던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서 보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 중 한 명은 산부인과 의사였다. 산부인과 의사에겐 다양한 사연을 가진 환자들이 찾아왔는데, 그중에 습관성 유산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일부분으로 다루어졌다.

  아이 갖기가 좀처럼 쉽지 않던 나는,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속으로 앓고 있던 나는 왠지 그 이야기가 나온 후 드라마가 보기 힘들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내 속이 베베 꼬여서였다. 드라마 속 하나의 에피소드로 맘 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공감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저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드라마 속 에피소드에서 비슷하게 나오니까 제 혼자 토라져서는 회피해버린 것이다. 솔직히 그런 옹졸한 마음에서였다.




  최근엔 좀 줄어든 것 같지만, 한 때는 귀여운 아이들이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도 참 많았었다.

  나도 한 땐 즐겨봤었다. TV로 보는 것이 다지만 짜파구리를 뇸뇸뇸뇸 잘 먹던 윤후나, 엉뚱한 매력을 가진 세 쌍둥이의 막내 만세를 마치 내 조카라도 되는 것 마냥 귀여워했었다. 단순히 귀여운 애들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은 얘들이 저런 체험도 하는구나, 저렇게 생긴 장난감도 있구나 하면서 낯설었던 육아 이야기들도 참신하게 다가왔었다.

  그렇게 잘 보던 육아 프로그램도 언제부턴가 눈길이 가지 않는 이유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지 않는 이유와 같아서였다. 내 아기가 생기지 않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에서 TV에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보면서 맘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미웠던 것도 아니었고, 예쁜 아이들과 함께하는 부모들이 마냥 부러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이유 없는 회피였던 것 같다. 나중에 만날 아이를 위해서 하나씩 봐 놀 법도 하고, 그저 예능으로 받아들이고 웃으며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렇게 속이 좁은지 차마 눈길이 가지 않았다.

  

  속 좁은 나와 달리 아내는 육아 프로그램도 잘 봤다. 저 아이 정말 귀엽다면서 내게 봐보라고도 하고, 엄마와 딸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서는 우리도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저렇게 조곤조곤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보도 한 번 봐봐, 귀엽지 않아? 하고 말하며 TV를 보는 아내의 말에 아마 난 떨떠름한 리액션뿐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난임인 이유가 아내가 아닌 나에게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더 아내에게 힘을 보태줘야 할 상황이었을 텐데. 난 괜한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저 눈만 감고 있으면서, 코 앞에 문제가 안 보이니까 사라져 버린 줄 알고 멍청한 짓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비겁한 놈.




  하루는 부모님 집에서 식구들이 모여있는데, 틀어놓은 드라마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돼서 놀라는 가족 이야기가 나왔다. 째 임신한 거 같더라니까 하고는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는 엄마를 보면서 영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있다. 당연히 손주야 기다리겠지만은 항상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만 하시고 다그친 적 한 번이 없는 엄마, 아빠였는데, 난 혼자서 그 자리가 왜 그렇게 불편했던지. 자괴감, 열등감, 죄송함 뭐 그런 감정이었을까.


  한 번씩 뉴스를 보다 보면 이유가 어찌 됐든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괜히 그런 뉴스를 볼 때면 혼자 얼굴에 열이 오를 때가 있었다. 적절한 생각은 아니겠지만, 저렇게 원치 않는 이들에겐 아이가 생기면서 간절히 원하는 내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성질도 냈었고, 내가 그렇게 잘한 것도 없지만 또 그렇게 못한 것도 없지 않냐며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며 대상 없는 원망도 했었다.

 



   나는 쪼잔한 사람인가 보다.

  세상 쪼잔해서 육아 프로그램도, 임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도 보기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오은영 박사가 나오는 '금쪽같은 내 새끼'를 아무렇지 않게 본다. 그냥 보는 것도 아니다. 다음 달에 태어날 내 아이는 엄청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보기까지 한다.

  글을 쓰면서도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 임신, 출산, 육아 관련 정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날, 눈치 빠른 아내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아마 여보도 힘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해줬을 것 같다.

  누구라도 그런 나의 옹졸한 마음을, 모습을 봤다면 한 번만 너그러이 넘어가 주길. 그만큼 아이가 보고 싶었나 보다, 그만큼 간절했어나 보다 하고 이해해주길.

  그리고 그 쪼잔함에서 벗어나게 해 준 아가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참으로 고맙다.  쪼잔했던 지난 시간을 갚으려고라도 이젠 좀 더 속 넓은 아빠가, 남편이 되어보고 싶다. 

이전 01화 아내 배에 주사자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