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요즘 쇼핑 삼매경에 빠져있다. 쇼핑으로 쓴 생활비 카드 사용내역이 하루에도 몇 개씩 톡으로 울려댄다. 아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들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생아용품이다. 예정을 아직 남았지만 당장 내일 태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우리 아기. 아기를 맞이하기 위한 각종 물품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내의 5벌, 배냇저고리 5벌, 보디슈트 2벌, 신생아 양말 3~4짝, 손싸개 2개, 속싸개 2개, 면봉 2통, 체온계 1개, 손톱 가위 1개, 젖병 3~5개, 젖꼭지 3~5개, 젖병 세정제 1통, 젖병 집게 1개, 거즈 수건 20장, 타월 10장, 물티슈 1박스, 모유 저장팩 1팩, 분유 1~2통, 기저귀 1박스, 기저귀 커버 2~3개, 기저귀 휴지통 1개, 아기띠 1개, 이불 2채, 유아전용 세제 1통, 아기 욕조 1개, 로션 1통, 샴푸&위시 1통, 발진 크림 1통.
위에 적은 목록들은 출산 전에 미리 준비해놔야 할 아기를 위한 출산 준비물 체크리스트다. 아내는 육아 관련 잡지에서 이 목록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고는 나중에 요긴하게 사용하겠다며 곱게 오려두었다. 그리고는 최근에 그 목록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해 가면서 용품을 준비하고 있다. 위에 적은 것들은 아기 용품만 적은 것이고, 거기에 더해 엄마를 위한 출산 준비물 체크리스트까지 있다 보니 사실상 출산 전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많다.
무슨 일이 됐든 간에 소위 말하는 템빨을 안 받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배드민턴 배울 때가 생각난다. 배드민턴 채라고는 마트나 문구점에서 파는 것만 잡아보고 살다가 처음으로 돈 10만 원이 넘어가는 채를 집고 셔틀콕을 쳐봤다. 채를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셔틀콕이 팡팡 잘 뻗어나가던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나중에 20만 원이 넘는 다른 사람 채를 잠깐 쓴 적도 있었는데, 그 채는 10만 원짜리 채랑은 또 다르게 어찌나 좋던지. 수세미 뜨는 뜨개질도 바늘이 좋으면 술술 잘 떠진다고 그러던데 이래서 사람들이 장비 탓을 안 할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필요한 육아용품도 저렇게나 종류가 많고, 가격대도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던데... 물론 아직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육아 역시 템빨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체크리스트를 앞에 두고 아내는 고민이 많았다. 어떤 브랜드 제품을 사야 할까, 굳이 비싸게 살 필요가 있을까, 혹시라도 친구에게 받을 수 있는 건 없나, 중고물품으로 구매해도 될까 등. 보통 쇼핑은 즐거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 보였다.
한 번은 내가 아내에게 그냥 체크리스트에 있는 목록들을 별 고민 없이, 개수만큼 다 사면되는 거 아니냐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가 아내에게 혼난 적이 있다. 아기 피부에 닿고, 입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것들인데 개수만 맞춰서 그냥 사는 게 말이 되냐며 호되게 혼이 났다. 그러면서 어떻게 스스로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며 장담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저 나 편하려고 한 소리라서 찍소리도 못하고 혼이 났었다.
원래 쇼핑에 있어서, 특히 온라인 쇼핑에 있어서는 아내가 나보다 백만 배는 현명하고 경쟁적인 쇼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평소 필요한 물건이 세일을 한다 치면 대뜸 구매부터 하는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쇼핑 초보에 불과했을 것이다. 뭐 하나를 사더라도 아내는 여기저기 사이트를 다 들어가 보면서 꼼꼼하게 가격비교를 했다. 쿠폰이나 카드 할인에는 뭐가 있는지까지 따져보면서 현명하게 소비할 줄 아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저 많은 물건들을 구입을 해야 하니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에 다른 물건들도 아니고 우리 아기가 쓸 물건들이 아닌가. 어떤 브랜드가 안전한 성분으로 만들어서 파는지, 혹시라도 아기에게 유해한 성분이 검출된 용품은 아닌지 블로그나 맘 카페를 찾아들어가야 알 수 있는 세부적인 정보들까지 샅샅이 살펴보기까지 하다 보니 쉽게 끝날 쇼핑은 절대 아니었다.
잠깐 어설프게 공부한 정보에 의하면 아기들 젖병만 해도 유리젖병이 있고 플라스틱 젖병이 있는데, 플라스틱 젖병은 또 PPSU 소재 젖병이 있고 PP 소재 젖병이 있단다. 이 젖병들이 만들어진 소재에 따라서 젖병 소독 방법이 다르게 해야 좋다고 해서 각 소재마다 어울리는 젖병 소독기 제품들과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결론은 젖병 하나 사기도 매우 어렵다는 것.
거기에다 체크리스트에 없는 물건들도 준비해야 한다. 아기 침대와 신생아 바구니 카시트는 아기용품 대여점에서 대여를 할 계획이고, 젖병 소독기는 살 지 말 지 아직 고민 중이다. 별 일 아닐 줄 알았던 준비물 챙기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왜 게임에서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엄청난 아이템들은 그걸 얻는 과정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거나 얻을 수 있는 확률 자체가 말이 안 되고 그러지 않던가. 이 고난과 역경의 쇼핑 끝내 얻는 신생아 용품들이 우리 아기 육아에 있어 한 줄기 빛이 되길 기대해 본다.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되는 일이 몇몇이 있었다. 아무래도 요리실력이 좋은 아내는 주로 요리를 맞게 되었다면 나는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도맡아 했다. 고양이들 화장실 청소와 양치시키기가 나의 역할이었다면, 고양이 발톱 깎기는 아내의 역할 었다. 여행을 갈 때도 아내는 비행기와 호텔을 예매했고 나는 현지에서 길을 찾거나, 스케줄을 짰다.
어쩌다 보니 우리 부부 중 인터넷으로 생활용품이나 먹거리를 구매하는 일은 지금껏 아내가 맡아했다. 앞서서도 말했듯이 아내가 나보다 쇼핑을 훨씬 현명하게 할 수 있다 보니 아내가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판단해서였을까.
그래서일까 그 수많은 출산 준비물을 아내 혼자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는 출산 준비물만큼은 같이 준비하고 많이 도와주려고 했는데, 최근에 일이 바쁘다는 걸 핑계로 슬쩍 뒤로 빠져서는 아내가 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아빠가 되는 일만큼은 게을러지지 않으려 했는데, 제 버릇 남 못준다고 그새 또 나태해졌다.
우선, 그 피곤한 일을 혼자서 잘 해준 아내에게 고맙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축복이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미래의 나야. 아직 체크가 안된 리스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렴. 남은 출산 준비물이라도 아내와 같이 알아보고 구입해라.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이 글을 봤을 때 어땠는지 한 번 봐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