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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삼거리 Mar 20. 2023

봄, 꽃

계절과 함박꽃나무

 올해는 집 근처 나눔 텃밭 분양받기에 성공했다, 3년 만이다. 신선하고 쫄깃한 채소를 떠올리니 생각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 밭에서 자란 제철 채소를 공급받는다는 것은 식탁의 고민을 하나 더는 일이다. 깨끗하게 씻어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그래서 돌이켜보면 역시 지난겨울은 아무리 사철공급받을 수 있는 채소들이 있지만 가격면에서나 생생과 맛에서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고 지루해지기십상이었다. 이건 가을 무가 철일 때의 단무지, 땅콩이 철일 때의 땅콩버터 같은 가공식품도 맛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 이후에 더 심해졌다. 그렇지만, 그럴 때 어김없이 동지, 설날과 정월대보름에 맞춰 김장김치와 말린 곡식, 나물들이 힘을 발휘하며 기분전환을 시켜준다. 김치가 떨어지는 봄이 되면 씁쓸하면서 향이 강한 야채들의 씩씩한 기운으로 한 번의 고비를 더 넘고, 비 온 뒤 씨앗을 심으면 삐쭉한 새싹들이 나기 시작할 것이다. 올해는 산머위잎을 맛보았다.


 4월 느지막이, 많은 꽃들이 화려하게 펑펑 피어있는 봄에 창경궁 홍화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낮은 관목 정원에 아담한 하얀 꽃몽우리를 볼 수 있다. 친절하게 이름이 적혀있다, ‘함박꽃나무’ 식물도감에서 본 봄의 꽃. 뽀얗고 둥글둥글하게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정해 보이고 이름 또한 마음에 드는 보고 싶은 꽃이었다.

 다른 꽃들처럼 곧 피겠구나 싶어 며칠을 더 가서 보았지만 변화가 없었다. 내일은 이래서 못 오고, 모래는 저래서 못 오니 오늘은 꼭 피어주면 좋겠는데 '안 되겠니?' 급한 성격의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닦달해 보았지만 꿈쩍이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나의 성질만 드러내는 것으로 끝날 의미 없는 재촉이다. 기다려야 한다. 나로서는 꽤 까탈스럽게 생각되었다. 급하게 날이 더워지고 주말을 보내고 비가 오고 잊었다가 다시 가 보았을 때는 꽃이 지고 짙은 여름이 시작된 때였다.

함박꽃나무, 4월 말

 다시 보게 된 것은 우연이였다. 다음 해, 이번에는 5월의 마지막 주 초여름, 서울역 앞 수많은 버스들이 오가는 환승센터 위 '서울로7017'에서. 쨍쨍한 햇빛에 눈이 부셔 반쯤 감고 지나다 눈에 띄는 하얀 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꽃이다. 목련 같이 도톰한 흰 꽃잎이 조금은 수수하게 펼쳐졌는데 그 안의 붉은 꽃 술은 기하학 패턴같이 또렷하게 느껴지며 화려한 조금 이상함이 있는 꽃이다. 5월의 꽃은 장미만이 아니었다. 올해는 어떤 모습의 함박꽃나무를 보게 될까.

함박꽃나무, 5월 말

 동네 산수유꽃들이 활짝 피었다. 화단의 어린 매실나무도 붉은 꽃을 피웠다. 진달래와 개나리도 종종 보인다. r의 학교친구 00이네 집 앵두나무에 꽃이 피었는데 약간 이른 것일 까. 조금 있으면 목련이 피고 질 것이고, 하얀 벚꽃 비가 내리고 나도 한참 북한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분홍 왕벚꽃길을 산책할 수 있고, 지대가 높은 산중턱의 구름나무는 그제야 조그만 하얀 꽃잎들을 냇가에 흩뿌릴 것이다. 붉은 벽돌 담장에 늘어진 능선화길을 걷다 보면, 학교 운동장 옆 펜스에 기대 있는 장미 길을 달려 텃밭으로 갈 수 있다. 그곳에는 쌉싸름한 보랏빛을 띠는 상춧대에 꽃이 올라와 있을 것이고, 작고 진노랑 꽃을 피운 텃밭 작물들이 (조금 과장해서) 밀림처럼 우거져 있을 것이다. 바질 꽃 주변에는 벌과 나비가 오간다.


  '이제 한여름이구나.' 하며 '꽃은 다 졌지.' 할 때, 동네 학교 공지에 심어진 배롱나무가 힘들게 꽃을 피운다. 관리받고 있지만 서울의 겨울은 춥고 한해 한해 힘겹다. 자주 가던 주문진 복숭아(장덕리) 마을 숙소 근처의 오랜 가옥들은 훤칠하게 잘 자란 배롱나무를 한 그루씩 가지고 있었고, 그 나무들은 여름의 바다와 나뭇잎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을 찐 분홍의 꽃들을 마당에 가득 뿌려놓았기 때문에,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동네 배롱나무를 보면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을과 겨울의 꽃 이야기도 이어서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한풀 꺾인 저녁 햇살 속의 '노래하는 사람'처럼 숨을 고르는 편이 좋겠다, 사실 이제 막 봄이 막 시작되었으니.


 그럼 우선 올해의 꽃들은 여기서 안녕히.

 (브런치 글쓰기 알람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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