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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에 대하여

by 고양이삼거리

갑자기 추워진 기온에 4시간마다 10분씩 돌아가는 바닥온수난방 방바닥이 차갑게 느껴진다. 베란다에서 r이 돌보는 루꼴라, 로메인, 바질 식물 삼총사를 안으로 들여놓고, 창문을 반쯤 닫고 보일러 작동시간을 한 단계 올렸다. 한동안 잊고 있던 보일러 설정을 조절하고 나면 가을로 깊이 들어간다. 밖은 조용하고 안은 냄비 안에서 바글거리며 끓고 있는 밤 소리에 분주한 밤이다, 때는 가을 밤.


매해 이때는 산자락 너머에서 올라오는 밤과 겨울날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이 준비라는 것은 해뜨기 전에 지금, 밤을 흠뻑 만끽하고 소모해서 어둡고 차가운 나의 냉장고 한편에 남겨질 어쩔 수 없는, 알 수 없는 일들을 줄여나가는 것, 마음에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밤 다음은 김장김치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것들이 작은 그릇에 모두 자리를 잡으려면 어쩔 수가 없다. 저번 달 20kg의 밤이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면 가볍지’하고 제일 크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골라 추석 제례용으로 선물하고 생밤을 몇 개 오도독 부숴먹으며 한 냄비 삶아 먹고 오랜만에 보늬밤도 또, 한 냄비 만들어서 간식으로 잘 먹었다. 남은 것은 소금물에 담갔다가 잘 말려서 냉동실에 반 넣어놓고 냉장실에 반을 넣어 산뜻하게 마무리해 두었었다. 아침이 밝았다, 냉장고에 밤을 넣어 두었다.


그런데,

15kg의 밤이 한 포대 더 배달되었다.

그는 고구마 상자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이미 이전 글에서 고구마 한 상자 다루는 일에 대해 마음을 다잡으며 써 놓았는데, 그건 밤으로 가득 찬 냉장고와 한 포대의 밤에 떨어진, 돌멩이가 일으킨 잔물결 같은 것으로, 그 일을 가볍게 수습하고 다시, 밤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이런 순간, 나도 모르게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하며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리를 우리 집 식탁에 선보일 테니. 다시, 이 긴 밤, 뜨거운 밤을 조심히 꺼내 반을 가르고 속을 드러내 담는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익에 밤에 물을 약간 넣고 블랜더에 갈아서 밤 퓌레를 만들었다. 걸쭉하게 점도가 생긴 것이 신기하다. 땅콩을 갈면 땅콩 크림이 되는 것과 비슷한 걸까. 크림파스타 소스 같이 보이기도 하고 차갑고 부드러운 밤 맛이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찬 수프 같다. 밥을 해서 밤 퓌레와 물을 적당히 담아 끓여서 죽을 만들었다. 생밤 두 세알 넣고 끓인 맑은 밤 죽과 색과 질기부터 다른데 익은 밤을 그냥 먹었을 때의 단 맛이 생각보다 드러나지 않고 담백하다. 퓌레를 데워서 미음 같이 짙은 밤, 숲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 저녁식사는 피자와 인스턴트 수프여서 끓이다가 밤 퓌레를 넣어보았는데 이렇게 해서는 밤의 연한 맛이 드러날 틈이 없고 질감과 색도 거의 비슷해서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 참, r에게는 토스트 위에 삶은 밤과 반숙계란프라이를 얹어서 아침으로 주었다, 매쉬 드 밤 샌드위치.

밤 퓌레
삶은 밤 죽

물론 이것들은 우리 집 식탁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지만, 창의적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니고 대대손손 이어 서울의 부엌 경관에서 탄생한 요리 방법이다. j는 '건축은 상식이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역시, '요리도 상식이다’ 밤 죽은 '율자죽'이라는 조선시대의 번듯한 이름도 가지고 있다.


내가 밤과 밤 사이를 오가며 지금, 쓰고 있는 건 무엇일까.


보늬밤
삶은 가을, 밤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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