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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삼거리 Sep 18. 2024

밤나무 아래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은 공원은 건너편 아랫마을에 있다. 낮게 이어지는 언덕의 자락과 아파트 단지,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숨어있다. 두어 바퀴 운동삼아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있고 벤치 몇 개가 놓였다. 이곳은 흔한 운동기구가 없고 화려한 색감의 탄성고무바닥재가 깔리지 않았고 무드등이 설치되지도 않았다. 조금 어둑한 그늘을 만들고 나뭇잎 사이로 빛이 새어들면 고요하다.


 마른 밤나무 잎 세 개가 뱅글뱅글 돌고 있다. 그들은 삼각형을 그리며 같은 속도로, 같은 움직임을 하고 어딘가로부터 내려와서는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바람은 잠시 멈추고 그들은 수직하강하여 바닥에 떨어졌다. 두두둑, 그 새 왼쪽 눈가로 빠르게 스크루 회전하던 길쭉한 잎 하나가 또 떨어진다. 아직도 덥고 푸른 이 공간을 뒤덮은, 시절을 잊고 햇빛에 몸을 맡긴 2024 서울, 9월 더위 속 푸른 잎들 사이에서 밤나무는 잎을 말려가며 송이를 떨구고 있다.   


 툭

 밤송이 하나가 저쪽편에 떨어졌다.

 툭

 밤송이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졌다.

 투-욱


나는 아까부터 벤치에 앉아있다. 마지막으로 소리가 난 오른쪽 편으로 시선을 돌려서 햇살이 내리쬐는 덩굴더미를 조용하게 보고 있을 때, 두 남녀가 나타나 떨어진 밤송이들을 헤치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흡사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처럼, 그늘진 수풀 사이에서 그리고 간간히 떨어지는 햇살 사이에서 한 손에는 먼저 주운 밤을 쥐고 허리를 굽혀 몇 알을 더 주워서 호주머니에 담았다. 나를 의식한 것인지 언제나 측면만을 보여줬으므로 나는 더 회화적으로 느꼈다. 아니 그럴 거면 저쪽에도 저-어 쪽에도 밤나무가 있는데 굳이 내 앞으로 끌리듯 그들이 멈춰 선 것은, 막 떨어진 밤송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바닥을 헤치는 것은,  알 수 없는 이 한 편의 그림 같은 장면을 추석의 마지막에 남기기 위한 끌림인 것인가. 어제 소원을 빌며 돌던 500살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본 달은 무척이나 밝았다. 뉴스에서는 '슈퍼문'이라고 했고 '수퍼문에 가까운'이라고도 하면서 나를 헷갈리게 했으나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는 충분하다. 나와 장면 사이를 노란색 벙거지 쓴 여자가 세 바퀴째 돌고 있다.  


 산길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는 조그마한 밤알갱이 하나를 손에 쥐고는 그 귀여운 녀석을 어쩌지 못해 하면서 눈이 마주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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