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리아, 터키의 사파이어

멈췄을 때 보이는 것들

by Shin란트로

지중해가 품은 시간의 정원

안탈리아(Antalya)에 도착한 순간부터 뭐랄까, 누군가의 여름별장에 초대된 듯한 낯선 호사를 느꼈다. 고대 로마의 황제가 사랑하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도 여름 별궁을 지었다는 도시니 그런 느낌이 괜히 든 건 아니었다.


이곳의 이름은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2세에서 비롯됐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팜필리아 지역의 중심 도시로 크게 발전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하면서 이 항구를 지나갔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신들의 휴양지'라는 별명이 보여주듯, 지금도 터키 사람들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까지 즐겨 찾는 휴양 도시로 알려져 있다.


터키는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시대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느낌을 주는 나라다. 돌 위에 돌이 쌓이듯, 나무의 나이테가 해마다 겹을 더하듯, 이곳 역시 지난 시간들이 그렇게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역사의 한 겹이 내 발끝에서 또 하나 보태지는 느낌이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줄만 알았던 시간들이 알고 보면 어딘가에 쌓여서 지금의 나를 빚어놓았다. 안탈리아의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삶이란 흘러가면서도 지금과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칼레이치(Kaleiçi) 고대 도시의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오래된 시간의 정원에 불쑥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돌길, 서로 다른 언어가 뒤섞인 여행자들의 경쾌한 목소리,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신료 냄새까지. 이 도시의 모든 게 활기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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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야알트 해변의 기억

나는 워낙에 약골 체질이다. 반면 내 옆지기는 건강 체질이고, 두 아들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옆지기의 체질을 닮았다. 우리 집에서 나만 건강하면 모두 다 '양호한 상태'인 게 불문율 같다. 그런 옆지기가 오십 중반에 들어서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단다. 지칠 줄 모르던 에너자이저였는데, 손가락에 방아쇠수지도 오고 하루 좀 심하게 들고 나르면 허리가 고장 났다. 게다가 술은 끊은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방간이 있어, 간헐적 단식을 한 지 일 년쯤 되어간다. 하루 두 번만 먹으니, 이번 여행 중에도 호텔 조식은 건너뛰거나 과일이나 삶은 달걀 정도 챙겨서 일정을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안탈리아에서는 조금 여유를 가졌다. 늦은 아침, 조식 뷔페로 내려갔다. 갓 구운 빵 위에 부드러운 카이막을 넉넉히 올리고, 벌집이 그대로 씹히는 꿀을 얹어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함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퍼져나갔다.
터키는 카흐발트(Kahvaltı)라고 해서 아침 식사를 거하게 차려 먹는 문화인지라 먹을거리가 아주 많았다. 배가 불러오는 게 왜 그리도 아쉽던지. 그 고소하고 달콤한 여운에 하루 종일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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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젖으로 만든 카이막(좌)에 벌집 통째의 꿀(우)과 견과류를 얹어 먹는다.(중앙)

크라운 호텔 수영장을 지나면 왼쪽으로 작은 지하 통로가 있다. 이곳을 따라가면 콘야알트 비치(Konyaaltı Beach)로 바로 이어진다. 안탈리아에서 가장 넓고 유명한 해변이다.


이곳의 바다는 유리처럼 맑았다. 햇살을 머금은 푸른빛은 바라보는 방향마다 빛깔을 달리하며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발아래의 매끄러운 자갈은 파도에 닳아 마치 손길처럼 부드럽게 발바닥을 어루만졌다. 바람에 바다가 움직일 때마다 일어나는 부드러운 물결, 그 물결이 자갈 사이를 빠져나가며 들려주는 파도와 자갈의 속삭임.
‘샤르르르… 돌돌돌…’
그 자연의 소리가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주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은은하게 반짝이는 자갈, 그리고 멀리 병풍처럼 둘러선 타우루스 산맥의 실루엣. 어릴 적, 벽걸이 달력에서 봤던 사진이 딱 이런 풍경이었다.

콘야알트 비치

잔잔히 밀려왔다가 이내 물러가는 파도를 바라본다. 모든 것에 밀물과 썰물처럼 때가 있다는 걸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힘든 시간도 지나가고, 좋은 시간도 영원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해진다.


지중해의 골목, 무지갯빛 이야기

오후에는 마리나(Antalya Kaleiçi Ancient City & Marina)메르멜리 비치(Mermerli Plajı)에 다녀왔다. 시야를 가득 채운 터키쉬 블루의 바다, 그 위로 쏟아지듯 흘러내리는 햇살. 바다에 몸을 던지거나, 해변 선베드에 누워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었다.

메르멜리 비치에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쌓였던 작은 근심들이 파도에 휩쓸려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바다는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에서 얻는 위안이란 게 이런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앞에서, 삶의 무게 또한 잠시 가벼워졌다.


해변에서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까지 골목을 따라 걸었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이런 고대 유적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게 이제 더 이상 생뚱맞지 않았다. 유적은 유적대로 의미를 가지고, 현재는 현재대로 그 의미를 쌓고 있는 중이었다.

안탈리아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

칼레이치 골목을 헤매다가 우산 거리(Umbrella Street)에 들어섰다. 우산 거리는 포르투갈 아구에다에서 시작되어 세계 여러 곳에 있다. 이스탄불에도 있었는데, 일부러 가보지는 않았다. 머리 위로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매달려 있고, 햇살에 드리운 그림자가 바닥 위에서 춤을 춘다. 우산 그림자를 밟으며 걷기만 해도 재밌었다.

형형색색의 우산이 만드는 터널을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골라보게 된다. 우리 삶도 각기 다른 우산 아래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빛깔 우산들이 어우러져 거리 풍경이 아름다운 것처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니, 세상도 한층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안탈리아 우산 거리(Umbrella Street)


부서짐을 통해 빛나는 법을 배우다

바다로 떨어지는 뒤덴 폭포(Lower Düden Waterfall) 물줄기는 햇빛을 받아, 어느새 눈앞에 무지개로 피어난다.


내 삶에도 이 폭포 닮은 순간들이 있었다. 절벽 끝에서 내리 꽂히는 아픔과 깨어짐의 날들. 엄마를 평생 불구로 만들어버린 교통사고, 신용카드가 다 막혀버린 파산. 이에 비하면 남편과 싸우고 며칠씩 침묵으로 지새던 밤이나, 개구쟁이 아들 때문에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갔던 순간들은 이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추억에 가깝다. 그래도 그때는 분명 절벽에서 내리 꽂히는 물줄기처럼 무너지는 날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조각난 순간들 사이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장애를 이해하게 된 마음, 결핍 속에서 비로소 느낀 감사, 갈등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남편의 진심,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깨달은 모성애의 무게. 부서진 것처럼 보였던 순간들 사이로, 무지개가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폭포는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자신의 길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부딪히고 꺾인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단련의 과정을 피할 수 없나 보다. 부서짐도, 깎임도 결국 그 길을 만드는 과정이다. 폭포가 그렇게 우아한 이유는 떨어짐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폭포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으로 이렇게 전해줬다. 부서짐과 깎임의 끝에는 예상치 못한 영롱함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넘어져도, 또 넘어져도, 그 과정 속에서 결국 우리는 빛나게 된다고.


실용 여행 정보

안탈리아는 4월부터 11월까지 여행하기 좋은 시기이며, 연중 8-9개월 동안 수영이 가능하다. 날씨와 관광객 수를 고려했을 때 5월과 6월, 그리고 9월과 10월이 가장 좋다. 이 시기에 방문하면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햇살과 푸른 바다를 만끽할 수 있다.


안탈리아 국제공항은 도심에서 약 12킬로미터 거리로 20분~ 40분 정도면 시내에 도착한다. 도심 교통은 트램(트람바이)과 시내버스가 잘 연결되어 있어 해변이나 주요 관광지로 이동하기에 편리하다. 구시가지인 칼레이치에서는 대부분의 명소를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외곽으로 이동할 때는 로컬버스나 돌무쉬(Dolmuş)라고 불리는 소형 셔틀밴을 이용하면 경제적이고, 근교 유적지나 해변으로 이동할 때는 택시나 렌터카가 편리하다. 다만 여름 성수기에는 미리 예약해야 한다. 자전거 대여는 해변 산책로를 달리기에 적합하지만 도심에서는 경사와 좁은 도로 탓에 다소 불편할 수 있다.


칼레이치 구시가지는 안탈리아 여행의 핵심이다. 하드리아누스 문(Hadrian's Gate)과 히드륵 탑, 케식 미나레, 그리고 전통 바자르가 가까이 모여 있어 도보로 둘러볼 수 있다.
콘야알트 해변에서는 바다와 타우루스 산맥을 바라보며 일몰 산책을 즐길 수 있고, 라라 해변은 고운 백사장과 고급 리조트 시설, 다양한 해양 액티비티로 유명하다.
뒤덴 폭포는 상부와 하부 두 곳 모두 볼거리가 풍성하며, 쿠르슌루 국립공원은 도심 속에서 만나는 힐링장소이다. 또한 안탈리아 고고학 박물관에서 로마와 그리스 시대의 유물과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다.


안탈리아만도 충분히 볼거리가 많지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근교 여행을 포함해 보자. 인근의 페르게는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과 목욕탕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아스펜도스 극장은 세계적으로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난 원형극장으로 특히 오후 늦게 방문하면 석양을 배경으로 인상적인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시데는 해변 도시로, 아폴로 신전 앞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잊지 못할 여행의 추억이 될 것이다.




여행자의 노트: 생각 한 스푼 더

지중해의 쉼표에서—인생의 리듬을 다시 배우다


느림의 미학, 터키식 휴식의 발견

안탈리아에서 현지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을 보게 됐다. 찻집에서 차이 한 잔을 놓고 몇 시간씩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해 질 녘 산책을 즐기는 가족들, 바다를 바라보며 낚싯대를 드리우는 어부들. 이곳에서의 시간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의미 있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빠른 속도에 익숙한 나에게 이렇게 느린 삶의 리듬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효율과 성과에 매달려 살아온 내 모습을 발견했다. 빨리 달리는데 집중하느라, 정작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는 않았나 되돌아보게 된다. 삶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의미로 남는 시간들일 텐데 말이다.


음악에 쉼표가 필요하듯, 인생의 중간도 그렇게

안탈리아에서의 밤, 호텔 발코니에서 지중해의 야경을 바라봤다. 이번 여행에 수많은 의미와 계획을 담았지만, 이렇게 푹 쉴 수 있는 휴식의 장소가 꼭 필요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여행도 인생도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가끔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마무리도 멋지게 할 수 있다. 멈춘다는 건 우리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인정하는 겸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였다.


우리는 종종 쉬는 걸 게으름으로 여기고, 잠시 멈추는 걸 뒤처지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안탈리아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이런 생각이 바뀌었다. 휴식은 약함이 아니라 지혜이고, 여유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라는 걸 알게 됐다. 음악에 쉼표와 도돌이표가 있어서 멋진 선율을 만들어내듯이, 우리 인생도 적당한 쉼과 되돌아보는 성찰이 있어야 더욱 풍성해진다.


안탈리아는 아름다운 풍경만 기억에 남는 게 아니다.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유연하게 대하고, 세상을 조금 더 사랑하는 시선으로 보게 됐다. 삶을 보는 새로운 시선이야말로 여행이 건네는 가장 값진 선물 같다.

이 선물은 터키의 카이막처럼 쉽게 잊히지 않는다. 신선한 크림의 부드러움처럼, 금빛으로 흘러내리는 꿀의 달콤함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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