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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Oct 15. 2021

돈이 아니어도 괜찮아.

新소녀가장 5

추석 당일 새벽 차례상을 준비를 하기 위해 엄마가 부엌에서 달각달각 분주히 움직이셨다. 부엌 바로 옆 방에서 자던 나와 아이들도 깨서 아직 깜깜한 거실로 나와 잠을 쫓으려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쫘악! 촤라락!"


엄청난 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나와 아이들이 자던 작은방 천장 한 귀퉁이의 합판이 내려앉아 덜렁거리고 있었고 그곳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작은방과 부엌까지 순식간에 한강이 되었다. 


탕국을 올리고 나물을 볶으려던 엄마는 "엄마야, 이게 무신 일이고!" 하시더니 재빨리 가스 불을 끄고 팍삭 꿇어앉아 물을 닦아내기 시작하셨다. 너무 놀라 멍하니 서있기만 하던 나도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같이 물을 퍼냈다.


엄마의 신속했던 '재난 대응 능력'을 보여주던 그 장면이 며칠이 지나도 계속 생각났다. 


이게 무슨 일인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내가 멍 때리는 사이에 엄마는 마른 수건들과 쓰레받기, 대야까지 모두 들고 오셔서 물을 퍼내고 있었다. 


몇십 가지 음식을 챙겨야 되는 고난도 노동에 해당하는 차례상을 준비 중에, 천장이 내려앉은 그 순간, 즉시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요리 모드에서 물난리 수습모드로 태세를 전환했다.


상식적으로는 신체적으로 더 젊고, 더 많이 배운 나의 위기 대처 속도가 더 빨라야 될 것 같은데 환갑이 넘은 엄마가 재난에 본능적으로 대처하는 스피드는 정말 놀라웠다. 


빛의 속도를 자랑하는 엄마의 반사신경은 평생 몸으로 벌어먹고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아닐까? 평생 가난을 가까이 두고 살아서 가난해서 생기는 사건, 사고들에 대해 더 익숙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엄마의 생활 근육이 조금 슬퍼졌다.


쉬이 해결된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은 3층 주택의 2층 세입자이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3층 보일러 배관의 이음새가 끊어져 밤새 콸콸 쏟아진 물이 2층 천장에 스며들었다. 


우산에 빗물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우리 집 천정에서 들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3층에 올라가 끊어진 보일러 배관을 다시 이어놓으셨지만 이미 밤새 흘러나온 물의 양이 엄청났다. 며칠 내에 건조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햇볕 내리쬐는 한여름도 이미 지났으니 천장이 건조되는 과정에서 온 집안에 곰팡이가 필 것도 같았다. 


한바탕 쏟아진 물을 다 닦아내고 나니 전기가 나갔다. 천장이 젖었으니 누전 위험 때문에 자동으로 누전차단기가 내려간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시집온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추석 차례를 건너뛰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컴컴한 거실에 촛불을 켜놓고 친정부모님과 나와 우리 아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때아닌 불멍을 때리고 있었다. 


"아이고... 태풍 '사라'도 아이고 이게 무신 물난리고..."

"태풍 '사라'면 나라에서 보상이나 받지. 이게 뭔교?"

"그 옛날에 사람들이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당신이 어예 아노. 당신은 태풍 '사라' 겪어보지도 않았잖아."

"지금 겪고 있잖아요."

"맞네. 맞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부모님은 21세기에 촛불을 켜놓고 명절 아침을 맞으면서도 1959년 태풍 '사라' 드립으로 이 위기를 농담으로 받아치셨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 중 가장 값진 것을 꼽으라면 바로 유머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모조리 유머로 승화시키는 능력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이런 상황에 웃어도 되나 싶을 순간에도 웃고 나면 또 살아진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쓸개 빠진 여자가 되도록 5평 식당에서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노동에 노동을 이어가는 엄마와 허리 수술과 복지카드를 맞바꾼,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 라벨을 단 아빠. 스스로 벌인 일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지며 살아내는 모습을 내가 자라는 동안 두 분은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에게 돈 빼고는 모든 걸 다 주셨다.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 돈이 아니어도 괜찮다.  





사진출처 : https://www.ft.com/content/82374080-6576-11e4-aba7-00144feabd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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