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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18. 2024

이미리내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책리뷰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저, 정해영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4.7월 초판.  408쪽


(이 리뷰에서는 삶의 변화에 따라 여러 이름을 가진 여주인공을 '묵미란, 묵할머니'라는 대표적 이름으로 쓴다.)


한국 근현대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제목에는 “이름 없는” 여자라고 했지만 전체 스토리의 나레이터는 그녀를 “묵미란"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책의 내용에서는 세이프시프터(shapeshifter, 변신하는 사람)로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여자이다.

미디어를 통해 이 책을 알게됐고, 현대소설의 담론부족에 갈증을 느끼던 차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이광수의 <그 여자의 일생>, 채만식의 <여자의 일생>에 대한 오래 전 기억을 소환했지만 그 책들의 주인공 여자와 “묵미란”의 여자의 일생은 결이 다르다. 세계 지배의 야욕을 품은 패권국가들에 둘러싸인 한국에서 전쟁시대를 살아온 여자는 개인사를 통하여 역사를 이야기한다.

“난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지.” 29쪽.

악독한 일본 식민주의에서 위안소를 거쳐 온 여자, 미군의 몽키하우스를 경험한 여자, 결국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분단된 나라에서 늙어가는 묵할머니, 역사의 수렁에 빠져가면서 그 수렁이 늪이었어도 불쑥 일어서 걸어나온 여자, 탈북자 묵할머니의 인생이 여덟가지로 분철된 책이다.


"트릭스터"라는 원 제목을 소개하고 싶어서 원본과 번역본을 함께 촬영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에 그녀는 어머니와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독살했다. 그후 2차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위안소, 한국전쟁 때는 부산의 몽키하우스, 냉전시대에는 중국의 개신교 교회로 옮겨다니며 생존해온 그녀의 이야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네 명의 남자를 살해하고 생존한 여자, 어마어마한 큰 일들이 어떻게 한 여자에게 연속적으로 일어나지? 믿을 수 없다. 저자 이미리내는 이모할머니 김병녀씨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이야기의 시작은 황혼요양원에서 일하는 중년 이혼녀 이새리가 이끌어간다. 이새리는 요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사망기사(책에는 '부고'라고 쓰여있다.)를 작성할 목적으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삶의 끝을 내다보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17쪽.

“모든 삶과 죽음이, 가장 눈에 띄지 않고 민폐가 되는 삶조차도, 말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18쪽

알츠하이머 병동에서 98세의 묵미란을 만난다. 묵할머니에게는 공유할 이야기가 많고 각 장은 그녀의 "삶" 중 한 부분을 탐구한다. 독자는 20세기 중반 남북한의 모습을 강렬하고 생생하게 보게 된다.

“노예, 탈출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 31쪽.

이것이 묵미란의 일곱 가지 정체성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단편 소설로 나뉘어져 있다. 다양한 "삶"은 연대순으로 연관되지 않아 혼란스럽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독립된 작품으로 제각각 다른 곳에서 출판되었고, 문학계의 유명 상을 수상한 단편소설이다. 연대가 뒤섞였을 뿐 아니라 각 챕터의 화자가 바뀌어 읽으면서 지난 챕터를 되돌아가 뒤적거리기도 하고, 앞에 올 장을 미리 살펴보게 된다. 혼란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무질서한 연대순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각 장에서 화자는 모두 “나”이다. 그러나 “나”는 동일한 한 사람이 아니고 챕터마다 다 달리 바뀐다.


"프롤로그"는 황혼요양원 이새리가 이야기 창고의 문을 연다. 이야기는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 인생, 북한 접경지대의 처녀귀신

1961

<머리디안Meridian> 2018년 여름호에 실린 단편이다. 이처럼 책은 '첫 번째 인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 인생"의 화자는 한 사춘기 소년이다. 임진강변 억새밭에서 노숙하는 북한 간첩, "처녀 귀신"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을 다룬다. 전체 서사 전개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 단편소설이다. 장편소설로서의 책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선뜻 알기 어렵다. 독자로서는 단편의 주인공이 역시 장편의 주인공이려니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일곱 번째 인생"에 가서야 "다섯 번째 인생"의 미친 처녀귀신이 장편의 주인공 묵할머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여성 사업가라는 빛나는 갑옷을 입기 전에, 미희의 어머니는 미친 전쟁고아 행세를 하기 위해 머리에 꽃을 꽂았다. 부랑자인 체하며 파주에 있는 미군 기지에 관한 정보를 은밀히 수집했다.“ 263쪽.

책을 반 넘게 읽으면 마치 해설처럼 “다섯 번째 인생"에 대한 이야기 줄거리가 나온다. 이런식으로 앞선 챕터의 이야기를 다른 챕터에서 대강 줄거리로 되짚어 펼쳐놓는다.


어려서 살던 시골동네에 미친 여자가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땐 '미친년'이라는 말이 흔했던 시절이다. '홍씨‘라는 남자 걸인도 있었다. 고무신 한짝을 손에 들고 침을 질질 흘리며 어슬렁거리고 다녔다. 홍씨는 나를 무척 예뻐해서 나만 보면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당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가정에서 전담하여 보살피지는 않았지만 이 두 사람들은 마을의 밥을 먹고 연명했다.

"북한 접경지역의 처녀귀신" 챕터를 읽으면서 먼 기억속의 두 사람이 불쑥 다가온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나라의 운명,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의 운명이다.



첫 번째 인생, 내가 흙먹는 것을 멈추었을 때

1938

<Black Warrior Review> 2019년 가을과 겨울호에 실렸다.

여주인공 묵할머니, 속임수쟁이의 기원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교육의 중요성을 믿지 않는 문맹의 어부였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흑과 백으로만 볼 수 있는 단순함의 세계에 살았고, 회색의 다양한 색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61쪽.

"엄마는 완벽한 여자였다. 똑똑하고 아름답고 교양 있고 자애로웠다." 62쪽.

묵할머니의 부모는 도대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부부이다. 반일 저항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박식한 외할아버지와 세련된 외할머니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묵미란의 어머니는 북부 농부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국가 붕괴의 산물이다.


어린 소녀 묵미란(물론 이때의 이름은 다르다. 나레이터 '나'이다.)은 흙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 지오파지(geophagy) 증세이다. 옛날 어른들은 뱃속에 회충이 있는 아이들이 흙을 먹는다고 했었다. 기억에서 사라진 흘러간 이야기지만 이 책을 읽으며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흙을 먹는 병은 이식증異食症의 일종이라고 한다. 주인공 묵미란은 토식증을 앓고 있었다.

"나는 마치 고양이 혀가 애무하듯 흙이 입천장 아래에서 미끄러지고 바지직하며 부서질 때의 느낌을 좋아했다." 61쪽.

그녀를 학대하는 아버지는 딸의 토식증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굿판을 벌인다. 여러 구실로 딸과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구타한다. 맛과 향을 구별하는 재주가 있는 엄마는 약초와 독초를 딸에게 가르쳐줬다. 딸은 '사화(蛇花-뱀꽃-씁쓸한 냄새가 나는 풀)'와 '사낙(蛇落-뱀땅콩- 독초. 발효된 대두처럼 퀴퀴하면서도 견과류처럼 고소한 냄새가 나는 풀)'의 미묘한 차이를 배웠다. 딸은 자신과 엄마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를 독살하여 근처 숲에 묻는다. 아버지의 썩어가는 시신이 흙과 섞여서 땅을 더럽힌다는 생각에 묵미란은 더이상 흙을 먹지 않게 된다.

"나는 자작나무 숲의 부드러운 흙 속으로 손을 찔러 넣고 한웅큼 움켜쥐었다. 그것을 입속에 밀어 넣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땅에서 손을 뺐을 때, 손가락이 아버지의 피로 검게 물든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내가 내 죄의 색에 직면한 바로 그 순간이 내가 흙 먹는것을 멈춘 때였다." 80쪽.


묵미란은 평양과 평안남도의 경계에 위치한 고아원겸 성냥공장 '성심'에서 캐나다 선교사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이때의 이름은 ‘데버라’. 그녀와 엄마는 뛰어난 언어구사력을 지녔다.

"내가 열두 살이 될 무렵에는 이미 어휘 수준이 아버지의 세 배는 되었다. 아버지가 배고프다고만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허기진다거나 아사직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62쪽.


세 번째 인생, 하우스를 뒤집어놓다. 1950

<Shenandoah> 2020년 가을호에 실렸다.

주인공은 '우리'라는 공동체의 나레이터로, '나'라는 개인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여성의 몸에 가해진 참상을 다룬다. 일제에 의해 이미 겪었던 위안부 생활은 조선인이 미군과 협력하여 성노예로 체계화된다. 그 과정을 도큐멘타리처럼 가감없이 묘사한다. 몽키하우스의 동료 용말은 끊임없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내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이야기가 그곳 소녀들에게 위안을 준다. 묵미란은 나중에 '용말'이라는 이름을 차용한다. 전쟁통에 죽은 소년의 시체에서 옷을 벗겨입고 남자 행세를 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생활을 펼쳐놓는다. '나'가 아닌 '우리'이다.

"한국전쟁 동안 우리는 정의하기 어려운 모호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었고, 공산주의자냐 자본주의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밤 나는 체온을 유지하고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 낯선 사람, 창백한 어둠 속에서 내 옆에 누워 있는 또 다른 인간과 우리를 이루려 했다." 83쪽.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이념은 몽키하우스의 소녀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온기를 얻을 사람이 중요했다.

"나는 누구를 섬길 것이냐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고 나를 때리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상관없었다. 내게는 무엇보다 생존이 중요했다." 91쪽.

묵미란은 생존하기 위해, 캐나다 선교사에게서 배운 영어를 이용하여 미군에게 접근하고, 미군을 따라 몽키하우스로 들어간다. 그녀의 가장 큰 재능은 그녀의 혀이다. 언어를 쉽게 습득하고, 단어 한두개로 대부분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평생동안 그녀의 언어능력은 생존에 큰 역할을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제시대 위안부 여성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심이 많지만, 미군에 복무한 몽키하우스의 여성들은 배척당하고 사회의 소외된 곳에서 방치되고 있다. 소수의 관심자들만이 늙고 죽어가는 그녀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국가적 '딸라($)벌이'였던 미군 성노예 여성들의 삶에 다시 관심을 갖게된다.


한동안 평택에 있는 '햇살사회복지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기지촌 출신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집에서 식당봉사를 하고, 오락도 하고, 수제비누 만들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몸이 게으르고 시간이 아까워지면서 참석은 않고 소액의 후원금만 보내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끊었다. 이 챕터를 읽는 동안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늙었다고 모든 봉사에서 손을 놓은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텐데...


몽키하우스를 탈출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보관한 창고는 늘 잠겨있고 경비가 지키고 있다. 이러한 장애는 묵미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수치심없이 물건을 훔쳐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타고난 소매치기였다. 나는 타인의 몸에서 온기를 훔쳤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귀중품도 취했다. 밥과 돈, 약, 그 밖에 뭐든지. 그들이 가슴에 숨겨놓은 모든 것이 나를 하루하루 버티게 해주었다." 101쪽.

삶을 '영위한다'는 말은 어불성설.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처연한 일인가.


두 번째 인생, 이야기꾼  1942

<Pleiades>  2020년 겨울호에 실렸다.

묵미란의 이름은 '간요'가 된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본식 이름을 새로 지어준 것이다. 조선말 사용은 금지되었다. 묵미란은 이름을 새로 지어주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고향의 명랑한 어린 소녀와 위안소에 있는 자신을 분리하고 싶었다. 일본 신민이 되어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는 말은 모두 헛소리였다. 최종 목적지는 인도네시아의 스마랑이고, 공장은 위안소였다.

동료 수감자(위안부) 용말은 이야기꾼이다. 용말의 고향 이야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위안부 소녀들을 위로하고,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다. 소녀들의 위안의 원천은 이야기였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병사들은 더욱 잔인해졌다. 소녀들은 강간, 구타, 말라리아, 결핵으로 죽어나갔다. 이야기로 위안을 삼던 밤의 위태로운 평화가 사라졌다. 용말이 죽자 위안부들은 무거운 침묵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용말의 이야기가 그녀 자신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나를 포함한 위안소의 다른 많은 여자들의 목숨을 구했다. ~~~ 용말의 죽음은 미자의 말도 앗아갔다. 미자는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 완전한 체념에 투신한 듯 보였다." 127쪽.

이야기꾼은 용말뿐이 아니다. 묵미란은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아버지를 어떻게 죽였는지 아버지의 최후를 지어낸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그를 독살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대기 위해 그의 죽음에 대한 허구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나는 남몰래 아버지의 시신을 자작나무 숲 깊숙이 묻고는 이웃들에게 어부인 아버지가 또 고래잡이를 나갔다고 말했고, 한 달 뒤 바다에서 폭풍우가 아버지를 덮쳤다는 가짜 전보를 내 앞으로 직접 보냈다." 133쪽.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일본군들은 위안부를 방공호에 몰아넣고 총살하기 시작했다. 묵미란은 여기서 살아난다. 인도네시아의 위안소를 벗어난 묵미란은 용말의 부츠를 신고 용말의 집으로 돌아간다.


네 번째 인생, 나, 나 자신, 그리고 볼록한 점  1955

<Massachusetts Review> 2021년 가을호에 실렸다.

용말은(용말 행세를 하는 묵미란) 평양으로 간다. 양복점 유리창 너머로 남편(용말의 남편)을 본다. 용말의 남편 영민은 부츠를 보고 용말을 알아본다. 자신이 만들어준 부츠다. 그러나 용말이 아님을 안다. 얼굴의 마맛자국같은 작은 점들, 헤어지기 이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는 용말과 다르다. 영민의 누이 영심도 용말이 변한 것을 의심한다.

"올케가 너무 많이 변했어." "그 오랜 세월동안 올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걱정 마세요, 누이." "난 아내를 잘 압니다." 158쪽.

묵미란은 영민과의 생활이 평생 처음 가져보는 행복이다.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용말이 아님을 들키면 끝장날 것같은 두려움에 영민과의 첫날밤을 미루고 미뤘다. 삼개월이 지나고 두달을 더하고, 또 한달이 지나며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용말은 남편에게 몸을 허락한다. 영민은 감동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민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졌다. 위안소에서 한국인 위안부들이 용말과 묵미란이 친자매처럼 닮았다고 해왔었다. 위안소에서 용말은 밤마다 자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용말은 죽었고, 그녀의 부츠는 미자가 신었었는데 미자도 일본이 패한 날 죽었다. 묵미란은 미자의 시신에서 부츠를 벗겨신고 죽은 용말의 집을 찾아갔다. 모두에게 10여년의 새월이 흘렀을 때다. 묵미란은 용말의 인생을 훔쳤다. 부츠뿐 아니라 그녀의 인생을 차지한 것이다.

영민은 용말이 잠든 사이에 발의 치수를 쟀다. 10여년 전 새신부일 때보다 발이 더 작아졌다. 발이 커지기는 하지만 작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영민은 잘 알고 있었다. 용말의 몸에는 완두콩만한 진한 자주색의 볼록한 점이 있었다. 영민은 집으로 돌아온 용말의 몸에서 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발이 더 커지면 새 신을 사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하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속이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가 있아야 이루어지는 행동임을 깨닫는다. 175, 176쪽.

영민은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비밀을 지켜준다.

묵미란이 왜 '용말' 행세를 했는지는 "여섯 번째 인생" 201쪽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여섯 번째 인생, 노란색 글씨의 공작원  2005

여섯, 일곱, 여덟 번째 이야기는 연대순으로 썼다. 이야기를 21세기 초반으로 끌어올려 북한 스파이가 된는 묵미란의 딸에게도 초점을 맞춘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나"가 이끌어간다. "나"를 박수사관은 "최선생"이라 부른다. 묵미란의 또다른 호칭이다. 묵미란이 딸(미희)의 성장과정을 회상하는 장면이 딸에게 쓰는 편지로 펼쳐진다. 문단을 건너뛰며 박수사관(남한의 국정원 간첩 수사관)의 질문과 최선생(묵미란, 남파간첩)의 답이 소개된다. 딸에 대한 이야기와 박수사관과의 문답이 교대로 이어지는 형식이다.

용말은 남한이나 일본에서 보낸 간첩으로 오인받아 RGB(Reconnaissance General Bureau 북한 정찰총국)로 끌려간다. 누군가의 신고 때문이다. 10년동안 사라졌다 돌아왔고, 외국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영민의 양복점에서 함께 일했던 미스터 신이 밀고자중에 끼어있었다. 용말은 부산에서 몽키하우스를 불지른 혐의로 연합군에 지명수배된 상태였었다. RGB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130연락소에서 남파간첩으로 훈련시킨다.

"저는 연합군에 지명 수배된 몸이었어요. 테러리스트로, 게릴라로, 그래서 북에서는 자동적으로 영웅이 되었죠." 206쪽.

딸 미희는 용말의 피붙이는 아니다. 영민의 누이 영심이 입양한 아기였다. 영심이 사고로 죽은 후 2살된 아기를 영민과 용말(묵미란)이 데려다 길렀다.

묵미란은 딸에게 자신이 살아온 방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너에게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하면 네가 콧방귀도 뀌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걸리지만 말라고 해야 했다. 나는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속임수를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습득한 내 주특기였다. 네가 내게서 제일 처음 배운 것들 중 하나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기술이었다." 189쪽.

미희(딸)는 “생활총화"시간에 제대로 발표를 하지 못해 선생에게 늘 혼난다. 생활총화는 반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자아비판 시간이다. 잘못이 없을 때는 잘못을 만들어서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 묵미란은 미희에게 이야기 꾸며내기 기술을 가르친다.

"믿을 만하고 죄로 고백하기에 충분하면서 동시에 무거운 처벌을 받거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을 피할 만큼 사소한 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190쪽.

“걸리지 않으면 부정행위가 아니다"는 가르침은 미희가 위험한 고비를 잘 넘기는 교훈이 되었다.

미희는 빨리 배웠다. 바로 어린 이야기 기계가 되었다.


속임수 이야기꾼 묵미란에 이어 또 하나의 속임수 이야기꾼이 자라고 있는 상황에 비애감이 든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며 이런저런 교훈을 주고 바르게 훈육하려고 애쓴다. 부모가 그리 살지 못하였어도 자식에겐 바른 길을 걷도록 가르치는 것이 부모다. 미희가 자신처럼 훌륭한 속임수 이야기꾼이 되도록 가르치는 묵미란의 현실에(그 당시에) 가슴이 에인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렇게 살아야 했구나. 거짓 이야기하는 법에 더해 우는 법까지 가르친다. 너를 화나게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폭발적인 감정을 울음으로 바꾸라는 울음기법을 가르친다. 심리적인 기법에도 울음이 나오지 않을 때는 생물학적인 기법을 시도해보라고 한다.

"눈을 계속 크게 뜨고 깜빡이지 않는 거야. 그렇게 1분만 하면 눈이 따끔거리기 시작하다가 화끈거리고 마침내 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눈물이 고일거야. 처음에 몇방울만 나오면 나머지는 줄줄 흐르게 되지. 해보면 알거야." 191쪽

텔레비죤 화면을 통해 보았던 위대한 수령님의 죽음에 반미치광이처럼 울부짓는 모습이 떠오른다. 위대한 수령님이 베푼 은혜에 감복하여 집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떠오른다. 우리가 화면을 통해서 보았던 그들의 눈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미희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남한 말에 능통하여 평양외국어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는다. 나중엔 김일성종합대학에 나녔다. 묵미란은 미희가 사업가나 외교관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미희는 RGB의 공작원이 된다.


일곱 번째 인생, 평범한 결혼에 대한 고백 2006

여덟가지 인생중에 가장 긴 이야기가 담겨있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나"에 혼란을 겪는다. 몇 문단을 읽어나가야 화자 "나"의 윤곽이 드러난다. "일곱 번째 인생"의 화자는 여럿이다. 배성미(미희)의 남편(에이드리언 루소)이 "나"로 시작한 이야기가 끝나면 화자는 미희로 바뀌고, 다시 루소가 이어받는 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생각들이 상세하게 펼쳐진다. 미희의 남편은 중국에 있는 남한의 개신교 교회에서 영어 통역과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북한 난민들을 숨겨주고 도와주는 일을 하면서 탈북자 배성미(미희)를 처음 만났다. 둘은 부부가 되어 서울에서 안정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아기도 낳았다. 아람이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미희는 스파이다.

"미희에게 스파이라는 직업은 그녀가 오랫동안 갈망해온 반항의 합벅적인 허가증이었다. 스파이 활동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인 비밀과 기만은 이미 그녀의 핏속에 있었다." 289쪽.

묵미란은 딸의 기질을 일찌기 알아채렸다.

"그녀는 미희의 어린 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녀의 호기심이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기심을 죽이기보다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290쪽.

묵미란의 딸 미희는 그렇게 스파이가 된다. 꽃제비 김철을 차용한 인물로,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친 배성미를 차용한 인물로 스파이가 된다.

스파이 묵미란과 스파이 미희는 서울 중림동에 있는 손기정 공원에서 한 달에 두 번씩 만났다.  묵미란은 미희에게 영민의 죽음을 전한다. 잠시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 젖는다. 묵미란은 미희에게 "이제는 때가 되었다"며 자수할 것을 상의한다. 챕터의 마지막 문장은 배성미와 루소의 관계가 거짓에서 진실로 바뀜을 암시한다.

처음에는 적이었으나 이제는 친구라는 미희의 고백으로 맺는다.


여덟 번째 인생,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책의 프롤로그를 연 황혼요양원 이새리가 화자 "나"로 등장한다. 사망기사를 쓰기위한 인터뷰가 차례로 소개된다. 몇몇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실제로 겪은 이야기에 판타지를 섞어서 전설을 만들어낸다. 이새리는 의문을 갖는다.

"스스로 만들어낸 전설로 과연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일까? ~~~ 어쩌면 그들은 정신이 소멸하기 전에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342쪽

이새리는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듣기로 한다.

"때로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자 유일한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342쪽.

이새리는 98세 묵할머니, 묵미란의 인생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4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묵할머니의 이야기.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을 이야기하는, 황혼요양원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이야기 타래를 술술 풀어낸다. 묵할머니는 딸 미희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한다. 북한 최고의 대학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녔다고. 딸은 지금 남편과 아들과 함께 미국에 살고있다고 했다. 사위와 딸이 모두 대학교수라고. 묵할머니 머리속에는 테니스 공만한 종양이 여러개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 흙을 먹기 시작했다.

묵할머니는 자신이 쓴 일곱권의 인생 이야기 공책을 이새리에게 내밀었다. 표지에는 모두 "여덟 가지 인생"이라고 쓰여있었다. 2번에서 8번까지, 일곱 가지의 인생이야기를 크레용으로 썼다. 이새리가 쓰고있는 사망기사, 부고가 여덟 가지 인생의 제1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묵할머니는 손자 아람이를 좋아했고, 남편 영민을 사랑했다. 용말의 남편이었다가 묵미란의 남편이 된 영민을. 영민은 속임수 이야기꾼, 가짜 용말보다 더 큰 속임수를 쓴 남자다.

영민은 딸 미희에게 말했었다.

"미희야, 가끔은 말이다. 가장 큰 속임수, 그리고 가장 친절한 속임수는 속아주는 거란다. 그것이 상대에게 소중한 위안이 될 수 있단다. 아가야." 326쪽.  

미희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항상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어머니가 속일 수 없었던 유일한 사람, 그리고 아주 쉽게 그녀를 속인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속아줌으로써 그녀를  속였다.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329쪽.

묵미란, 가짜 용말은 정말 몰랐을까. 남편이 다 알고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묵할머니의 시신은 요양원 북쪽 숲에 있는 작은 공터에서 발견됐다. 그날 오후 4시경, 부부로 보이는 한국인 여자와 외국인 남자가 요양원을 방문했다.

"묵미란씨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분의 딸입니다." 395쪽.

묵할머니의 입을 벌리자 숱한 속임수 이야기를 꾸며낸 그녀의 혀가 보였다. 혀에는 흙이 얇게 덮여져 있었다. 손톱밑에는 녹색 풀잎이 끼어있었다. 그녀가 이야기하던 독초 사낙이다. 러시안 블루의 하늘 아래에 묵할머니는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책 전체가 묵할머니의 이야기로 이뤄졌다.

김일성의 초상화를 모독한 죄로 사형당하는 꽃제비 김철의 최후 희망은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다.

"어떤 삶이건 소멸 직전에 이르러서는 표식을 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김철이 원한 것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것 뿐이었다." 251쪽

자살을 시도하여 사형에 처하게 된 마약 밀반출자 배성미(진짜 배성미, 미희가 아님)의 최후 바람은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운이 좋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증발해버리기 전에 말할 기회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261쪽.

묵할머니의 이야기는 황혼요양원의 부고기사를 쓰는 이새리에게 전해준 일곱권의 공책에 담겨있다.



원초적인 생존의 본능

‘너무 행복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고싶어’ 이러한 불로장생의 꿈은 생의 애착이다. 당장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생명과 함께 부여받은 생존의 본능이다. 이 책에서 ‘포기’보다 더 강한 ‘생존의 본능’을 읽었다. “이름없는 여자”가 생물학적인 생존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야기로 살아남은 이야기, 또 다른 생존을 이해할 수 있는 독서였다.

이 책은 “이름없는”, 그러나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역사의 한 부분을 기록한 책이다.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전쟁과 여성들의 운명을 기록했다.

데버라 간요 용말 최선생 묵미란이 대한민국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지정학적으로 패권국가들의 틈바구니, 아니 그 중심에서 생존의 줄타기를 하고있는 우리에게 한 마디 던진다. 유명한 광고 카피를 패러디하여 “너희가 역사를 알아?”


아쉬움

단편을 모은 장편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각 챕터의 시작에 명기했듯이 이미 유명지에 게재했던 단편들의 묶음으로 장편을 만들었다. 묵직한 담론, 대 서사를 애초부터 장편소설로 구성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대하소설에 익숙한 개인으로서의 생각이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인생은 차례대로 썼는데 아마도 장편으로 완성할 계획을 세운 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작가에게 주는 “윌리암 사로얀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영국 여성문학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문학적 가치와 작품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책이다. 이런 훌륭한 작품을 놓고 장이 바뀔 때마다 화자 “나”를 인지하는데 더듬거렸다.

각 챕터들이 완결성있는 단편임은 높이 평가한다. ‘결과적인 장편’에 아쉬울 뿐이다. 내가 소설의 새로운 형식에 뒤처진 독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트릭스터 Trickster

사기꾼, 속임수꾼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타이틀 번역에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간다. 책을 읽으면 '트릭스터'의 의미를 자연히 알게된다. 묵할머니가 일생동안 트릭스터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여러 번역이 있겠지만 가장 어울리는 말은 사기꾼이나 속임수꾼일 것이다. 주인공 묵미란이 트릭스터로 살아야했던 것은 묵미란의 잘못이 아니다. 시대가 그녀에게 요구한 역할이었다. 그런데 98세(사실인지 모르지만) 일생에 어떻게 '사기꾼'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리뷰를 쓰면서도 '사기꾼'이라는 단어는 피해서 썼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생존의 방법이었으므로 묵할머니를 존중해주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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