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 에피소드
여러 해 전, 여권에 남편의 성(wife of ...)을 기재하던 것이 배우자의 성(spouse of...)을 기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온라인 상에 '참 잘된 일이다'라는 내용의 댓글을 단 나는 공감을 받기도 했지만, 페미니스트들의 무차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정체성이 없다느니, 가부장주의 생각이라느니, 그게 뭐가 필요하냐느니, 여권에 왜 남편의 성을 밝혀야 하느냐 개인정보유출이다느니, 여러 공격들이 있었다.
여권법 시행령은 다음과 같다.
여권법 시행령 제3조의2 제2항 제4호
여권의 로마자 성에 배우자의 로마자 성을 추가ㆍ변경 또는 삭제하려고 할 경우.
남녀 성별을 불문하고 희망할 경우 배우자의 로마자 성을 여권에 추가(추후 변경ㆍ삭제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부 동반 출입국 심사시 관계에 대한 불필요한 질문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신청 시 여권에는
「 spouse of 배우자 로마자 성 」 형식으로 표기됩니다.
"외교부는 2012.4.23부터 양성평등의 원칙을 존중하여 기존 'wife of 남편 영문 성'에서 'spouse of 배우자 영문 성'으로 변경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외교부 공지사항이다. 남편에 속한 아내가 아니라 동등한 배우자로 인정하는 글 아닌가? 내가 방점을 찍는 곳은 바로 여기다. "관계에 대한 불필요한 질문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결혼반지를 꼈느냐 아니냐를 기혼자냐 미혼자냐의 기준으로 생각지 않는다. 각자의 성격에 따라 끼거나 안끼거나 마음대로지 그것이 무슨 결혼에 대한 사회적 기준은 아니다. 자주 몸이 붓는 체질인 나는 반지를 끼지 않는다.
독일에서 아이들과 함께 어학원에 다녔다. 학교에 댜니는 아들들은 주말반에서, 나와 딸은 평일반에서 독일어를 배웠다. 말을 익히는 곳이니 텍스트를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말을 많이 시킨다. 초기엔 말재주가 빈약하니 주로 집안이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출장오셔서 함께 지냈다, 함께 좋은 레스토랑에 갔었다, 아버지와 공부에 대한 논의를 했다, 수영을 배웠다, 특별할 것도 없는 어느 가정에서나 있는 평범한 일상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한국 식재료를 많이 가져와서 반가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남편이 한달 가까이 머물 것이다, 낼모레 떠날 것이다, 우리는 한달에 전화요금을 서울집에서 000, 독일집에서 000을 내는데 전화비는 아무리 많이 내도 한국과 독일을 오가는 비행기표 값보다는 싸다는 이야기를 했다. 말이 제법 늘었을 때는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 남편은 일년의 반을 외국 출장다니고, 우리가 독일로 온 후로 일터가 한국인 남편은 일년에 반은 한국에 있으니 우리가족은 어디에 살든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독일어 선생이 우리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다.
"엄마 아빠 너희들 다 함께 살아?"
아니,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외국 사람들은 사생활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데, 학원 선생이 무례하구나. 왜지? 참 의아한 일이다. 나중에 선생은 이러한 고백을 했다. 우리가 이혼가정인 줄 알았었다고. 엄마가 결혼 반지를 안꼈고, 아이들과 엄마가 서로 다른 성(Familienname)이라 그렇게 생각했었단다. 게다가 남편은 한국에, 아내와 아이들은 독일에 살고 있으니. 이런 참내, 멀쩡한 우리 가정을 이혼가정으로 봤다니. 허긴 이혼가정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호텔에 체크인할 때는 여권을 보여준다. 남편과 나는 성씨가 다르다. 가족이 아니다. 서로 남남이다. 결혼 반지를 안꼈다. 비혼 커플로 보일 것이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약혼관계일까? 성씨가 다른 남녀가 혼숙을 하니 불륜일까? 참 이상한 상황에 처한 우리 부부다.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부부인데 말이다.
얼마전 일본의 총리에 도전한 후보 고이즈미 신지로(小泉 進次郎)는 "총리가 되면 1년 내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일본 국민의 70% 이상이 결혼 뒤 희망하면 부부가 각자의 성을 사용하는 ‘선택적 부부별성’에 찬성하고 있지만, 현재 일본 부부의 95%가 남편성을 따르고 있다. 관습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다. 연구에 의하면 2446년에는 일본인 50%가 "사토(佐藤)"가 된다고 내다본다. 2531년에는 모든 일본인이 "사토"라는 성씨를 쓰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토"는 일본의 최다성씨이다. 우리나라의 최다성씨는 단연 "김"이다. 미래의 어느땐가 일본처럼 인구의 반이, 또는 거의 전체가 김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는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를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인구주택총조사 전수집계 결과를 살펴본다. 2015년 11월 1일 기준 총조사 인구는 5,107만명이다. 외국에서 귀화하여 생긴 성씨까지 합하면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한자漢字로 표기할 수 있는 성씨는 1,507개, 한자가 없는 성씨는 4,075개이다.(성씨별 본관조사는 15년 마다 함. 1985년, 2000년, 2015년 등 총 3번 이뤄짐.) 조사에서 김金씨는 10,689,959명으로 나타났다. 약 21%가 김씨이다. 다섯 명 중에 한 명이 김씨인 상황인데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을 따른다면 우리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전국민이 김씨가 될지를 연구해야할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다행이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는 맹세를 할 때는 흔히들 말하기를 "내가 성을 간다."고 한다. 자신의 맹세를 어기는 경우에 성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가문 대대로 이어온 성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인간말종이다. 욕된 말이다. 성을 지키는 것은 오래도록 따라왔던 우리 문화이다. 결혼 후에도 신부는 아버지의 성을 바꾸지 않는다. 여성의 정체성을 지키도록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좋은 제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며느리에게 가문의 성을 내어주지 않는 며느리를 왕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대는 일제강점기에 조상전래의 성을 지키기 위해 창씨개명에 적극 항거한 역사가 있다. 성씨와 이름을 지킨 가정과 창씨개명한 가정으로 애국이나 친일을 논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결혼하면 주로 남편의 성을 따른다. 우리가 살던 독일에서도 그랬다. 독일에서 결혼한 부부, 특히 여성의 성씨에 대한 변화는 오래도록 진행돼왔다. 수십년에 걸쳐 명명법의 변화가 이뤄졌다.
1958년부터 남성의 성에 여성의 출생 성을 추가하는 형태로 여성의 이중 성씨가 가능했었다. 1976년 6월 14일, 연방의회는 새로운 결혼법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명명법은 여성의 성을 결혼후 성으로도 선택할 수 있게했다. 출생 성을 앞에 놓거나 추가하여 하이픈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남성도 이중 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배우자 중 한 명만이 이중 성을 사용할 수 있다.
1991년부터 결혼 후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의 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가 어떤 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두 사람 모두 동의해야 한다. 1993년까지 한시적으로 아이가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에서 이중 성씨를 받는 것이 가능했다.
독일어학회(GfdS)가 5년간의 데이터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명명법 개정후 40여년 넘었어도 2016년에는 결혼한 사람의 75%가 남편의 성을 결혼후 성으로 선택했다. 12%는 각자 자신의 성을 지켰고, 8%는 이중 성을 선택했다. 커플 중 단 6%만이 여성의 성을 선택했다. 2024년에는 이제 부부가 함께 이중 성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부모가 없어도 자녀는 이중 성을 가질 수도 있다. 하이픈 없이 이중 성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법은 2025년 5월부터 적용된다.
남의 나라 성씨에 대해 굳이 자세히 알 이유는 없겠으나 외국의 사회문화를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면, 나의 이름이 그곳에서 바뀌거나 유지되거나 변화를 겪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이민간 시이모님 가족이 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이민생활의 일화는 가끔 우리가족의 대화에 회자된다. 김씨인 아들은 미스터 킴으로 불렸고, 덩달아서 임씨인 어머니가 미세스 킴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느 날 낯선 땅에서 길을 잃은 늙은 어머니를 경찰서에서 보호하며 아들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세스 영자킴(가명)씨 댁이죠?" "아니요, 그런 사람 없는데요." 경찰과 통화한 아들은 시간이 얼마 지나자 갑자기 '아, 우리 어머니. 임영자, 우리 어머니가 미세스 영자킴이 되셨지." 뒤늦게 깨닫고 경찰서에서 부랴부랴 어머니를 모셔왔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이 가정 뿐이랴. 이름까지 개명한 내 친구는 남편의 성을 따라 성과 이름이 다 바뀌어서 생소한 이름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부성승계주의를 택한다.
민법 제781조(자의 성과 본) (2005. 3. 31. 법률 제7427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①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② 부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③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서양에서는 아이들과 엄마가 성이 다르면 전남편의 아이들을 엄마가 양육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엄마가 현재 남편과 성이 다르고, 현재 남편과 아이들의 성이 같다면 엄마가 아빠의 새부인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법적인 가족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오랜 세월동안 흘러오던 풍습에 젖어있는 사회에서 생기는 오해이다. 현재는 독일도 대한민국도 가족에 대한 개념이 많이 바뀌었고, 따라서 성씨의 선택도 자유로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엄마의 성을, 부모 성을 모두 함께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혼 후 자녀들의 성을 바꾸는 경향도 드물지 않다. 법적 절차는 복잡하지만 아주 꽉 막힌 길은 아니다.
쓸데없는 상상을 더해본다. 이홍길동과 김박영자씨의 아들 철수는 어떤 이름을 가질까? 이홍김박철수? 이김철수? 홍박철수? 그 집 아들 철수는 이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증심의 행사 사진.
독일에 살면서 지방자치단체 관청(Landratamt)이나 또 시청(Rathaus)에서 여러가지 행정절차를 신청하고 면접할 때 아들들과 나는 서로 담당자가 달랐다. 사무실은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성씨로 알파벳 C가 첫 자인 나와 Y자로 시작하는 아들들은 한참 떨어진 다른 방에서 일을 보아야 했다. 우리의 성씨를 가나다라 순으로 배열하면 강씨와 한씨의 담당자가 서로 다른 것 같은 현상이다.
미국이나 주변 유럽국가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같은 방에 들어갈 때, 우리 아들들과 나는 마치 의붓엄마처럼 서로 떨어져 다른 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편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오래 전 일이다.
미성년자 자녀들과 함께 외국여행을 할 때 부모 증명을 해야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들도 있다. 자녀와 부모가 독립된 여권을 가질 경우 성씨가 다르면 친부모 증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손녀들을 데리고 독일을 갈 때는 '이 아이들은 내 가족이 맞다'는 증명서로 가족관계 증명서를 준비해갔었다. 손주들이라 우리 아들 딸(손주들의 부모)의 여행 동의서도 함께 영문으로 공증해 갔다. 일일히 조사를 받는 불편은 없었지만 유럽 몇 개 나라를 드나들 때 혹시 문제가 될까하여 준비한 것이다. 철저한 조사가 짜증나지만 그 불편은 우리들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남의 애를 데리고 외국으로 쉽게 나갈 수도 있다면, 그것이 혹시 범죄일 경우엔 어쩔 것인가. 모든 불편엔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은 여권의 패밀리 네임이 같으면 별 의심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일이다. 결혼후 남편과 성씨가 다른 점이 문화와 풍습이 다른 외국에서는 불편할 때가 있다.
아들이 수술받을 때는 마침 남편이 와 있어서 수술동의서에 아버지로서 서명을 했다. 남편이 곁에 없었다면 성이 다른 엄마인 나는 아들과 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도 함께 내야 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크고 넓어졌다. 법적인 결혼 이전에 하던 역할들, 사회적 지위들, 소지하고 있는 각종 자격증과 증명서들이 많다. 결혼 후에 모두 다 남편 성으로 바꿔야한다면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사회적 인간관계를 새로 맺듯이 주변에 자신의 변화를 인지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을 바꾸지 않고도 '000의 배우자'라고 기재하는 것은 참 편리한 방법이다. 자신의 아버지 성을 지킬 수도 있고, 여러 업무적 불편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제도가 아닌가?
새로 발급받은 여권에는 남편의 성을 함께 기재했다. "spouse of oooo". 여행가서 호텔에 내놓으면 우리는 떳떳한 법적 부부이다. 갑작스런 사고로 병원엘 가더라도 우리 부부는 당연히 법적인 보호자가 된다. 아주 위험한 수술이라도 허락한다는 서명을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증명 없이 여권 하나로도 가능하다.
온라인 상에서 "wife of ..."에서 "spouse of..." 로 바꿔서 기재한다는 외교부의 공지에 댓글을 달았다가 마구 뭇매를 맞았던 일이 생각나(억울하여) 이 글을 썼다. 외국에서 결혼 전 성씨를 지니고 살던 경험을 풀어놓았다. 내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남의 나라에서는 불편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다. 외국살이엔 서러워서 눈물 쏟을 일도, 기가 차서 숨이 멎을 정도로 웃을 일도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