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 에피소드
(이 기록은 특별히 독일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우리가 독일에서 살고 있을 때 겪은 일들이다.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위스에서라도 겪을 흔한 일들인데 독일생활중에 있었던 일들일 뿐이다.)
현대사회는 커뮤니티들의 종류가 다양하고 세분화됐다. 동학 同學, 향우회, 종친회, 각종 동호회 등 이루 다 셀 수 없는 그룹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여러 단체에 속해있고, 어떤 사람은 한 군데 집중하고, 또는 아무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소셜 미디어가 발달한 지금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과도 같은 그룹에 들어있다. 비온 뒤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처럼 사회의 방사형 그물망 곳곳에 그룹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동류의식, 동질감, 공감, 공유, 이런 단어들이 사람들을 한 끈으로 묶는다.
재외동포들은 대부분 '한인회'에 속해있다. 한시적인 재외국민들도 알음알음 인연을 따라 소모임을 통해 교류한다. 일시적인 여행자들은 어떠할까? 외국의 거리에서 동포를 만나면 어떨까? 반응은 가지각색일 것이다.
독일 생활 초기에 한국사람을 만나면 마치 오래 알던 사람처럼 반가웠다. 다가가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셨군요."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반갑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 단답으로 응대하고 가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 업무상 출장온 사람들은 대부분 거리에서 동포를 만나면 반가워하지 않는다. 차림새를 보면 출장온 사람인지, 관광 여행온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다.
여행자와 거주자의 반응이 다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개인의 성격에 따라 반응하는 것 같다. 낯선 여행자는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캐묻기도 하고(꼭 가봐야 할 곳등), 이제 막 이주해온 사람은 이미 익숙해진 거주자에게 현지 생활의 정보(한국식품점등)를 얻으려고 꼼꼼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독일에서 사는 동안 거리에서 우연히 한국사람을 만나면 초기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건넸지만 나중엔 그러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아는 체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귀찮아하는 것도 모르고 눈치없이 아는 척하는 것은 실례 아닌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첫 눈에 구별할 수 있지만 먼저 다가가지는 않게 되었다. 거리에서 한국말이 가까이 들려오면 얼른 고개를 돌려 사람을 확인하던 행동도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고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지않으면 내가 먼저 아는 척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
파독 간호원으로 독일남자와 결혼하고 수십년을 독일인이 되어 살아온 이웃이 있었다. 그 분, M은 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산다. 나이먹을수록 그리움은 더하는 것 같다. 한국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기분은 헤아리지도 않고 열심히 다가간다. 독일말만 하고 사는 M은 한국말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입을 여는 것이다.
뮌헨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출장인이든 관광객이든 어쨌든 마리엔광장(Marienplatz)에 들른다. 다른 거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한국사람들을 마리엔플라츠에서는 제법 많이 만나게 된다. 어느 날 M은 그곳에서 출장온 한국남자 세명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한국 사람이지요?"하고 말을 건넸다. 남자들은 다른 나라 사람인척 한국말을 못알아듣는 사람처럼 가던 길을 갔다. 무반응에 마음이 상한 M은 그들의 등뒤에 대고 "쪽발이인가봐."하는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그들이 뒤로 훽 돌아서더니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하고 무서운 표정을 짓더란다. 깔깔대며 떠드는 M의 말에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했다.
출장온 사람들은 현지에서 말걸고 아는체하는 중년부인이 반갑지 않다. 귀찮기만 하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그냥 못들은 척 지나가는데 "쪽발이인가봐" 소리가 등뒤에 꽃히는 건 견딜 수 없었나보다. 아니, 대한민국 국민에게 "쪽발이"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게 왜 외면하셨습니까? 반갑게 상대해줬으면 어쩌면 M네 집에서 저녁 한 끼 대접받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M은 사람 가리지 않고 다가가는 성격이었다. 친절해서 고맙다가도 달라붙어서 떼어내고 싶은 독일 국적의 한국인이다.
출장차 스위스에 간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배낭여행온 한국 청년들을 길에서 만났는데 뮌헨을 간다기에 우리집을 알려주었단다.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신원을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청년들을 집으로 보내다니, 남편은 가끔 무모할 때가 있다. 뮌헨에 가면 우리집에 가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러랬단다. 우리집은 민박집이 아니다. 우리집이 목욕탕이요, 세탁소요? 왜 밥먹으라는 말은 안했지? 밥은 당연히 먹일테니까? 아이고 맙소사! 거절같은 난감한 일은 언제나 내몫이고 그이는 세상천지에 둘도 없는 호인이다.
저녁무렵 꾀죄죄한 남학생과 씩씩한 여학생 둘이 우리집에 왔다. 마침 여름방학이라 딸이 와있었다. 며칠을 돌아다녔는지 차려준 밥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탁에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던 중에 딸은 그 남학생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남학생도 우리 딸이 눈에 익은 모습이란다. 탐정놀이하듯 파고드니 둘은 고3때 같은 독서실에 다녔다는 것을 확인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서울에서 같은 독서실에 다녔던 학생이 스위스 거리에서 한 아저씨를 만나고, 아저씨의 독일 집에 와서 독서실 동창생을 만나다니. 죄짓고 살지 말아야한다. 잘 살아야한다.
학생들은 하룻밤 자고, 한국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빨래를 해서 건조기에 말려입고 떠났다. 혀가 달을 정도로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고, 서울가면 우리 딸에게 멋지게 한턱 쏜다고 큰소리쳤다. 아쉽게도 그 뒤로는 전혀 연락이 없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반면교사가 되었다. 인생길에 만나는 훌륭한 스승만 고마운 것은 아니다. 반면교사가 주는 쓰디쓴 교훈도 성장에 필요한 약이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렇다, 사실이다, 낯선 나그네에게 천사가 현현한 것이다. 그 천사는 누구?
그이가 파리에서 행한 일화다. 공항에서 한 한국남자를 만났다. 한국에서 같은 비행기로 파리에 간 사람이다. 비행기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초조하고 불안해보이는 표정이었다고. 남편은 그가 어떤 어려움에 처한 것같아서 도와주기로 했다. 중편 소설 한 편쯤 되는 사연이 펼쳐진다.
남자는 선원으로 해외취업을 위해 라스팔마스(Las Palmas de Gran Canaria)로 가는 중이었다. 파리에 가면 비행기표가 있으니 그걸 받아서 라스팔마스로 오라는 현지인의 말만 듣고 한국을 떠난 선원이다. 파리 공항에 도착하였으나 어디에서 비행기표를 받아야 할 지도 몰랐고, 누구에게 물어볼래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영어도 불어도 못하는 한국인이었다. 돈 몇 푼과 라스팔마스의 전화번호만 가지고 있었다. 남편이 에어 프랑스 안내데스크에 가서 맡겨진 그의 티켓이 있는지 물었으나 그런 건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선원이 가진 전화번호로 수차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예약한 호텔로 데리고 가서 다른 방에 투숙시켰다. 이튿날 하루 일정이 꽉 찬 남편은 선원에게 돈을 주며 점심먹고 거리 구경을 하라고 했다. 일과 후 호텔로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는데 선원의 뱃속에서 우르르쾅쾅 소리가 났다. 종일을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사먹어야할 지 막막했던 것 같다. 이튿날 오전에 라스팔마스에 있는 회사와 겨우 통화가 되었다. 한국 선원들의 인력을 공급하는 한국인 직업소개소였다. 저녁에 공항에서 티켓을 받아 라스팔마스로 오라는 것이다. 선원이 아무 일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편은 자신의 일정 때문에 돌봐줄 수가 없었다. 한국식당에 전화를 걸어 아르바이트 할 사람을 구해서 선원을 맡겼다. 그는 항공티켓을 찾아 선원을 라스팔마스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그가 남편에게 선원과 남편의 관계를 물었다. 남편은 선원을 생전에 알지도 못하던 사람인데 비행기 동승객이었고, 파리 공항에서 처음 알게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호텔 숙박비와 식사비, 아르바이트비까지 적지않은 비용을 어디서 받느냐고 물었다. 누가 내게 돈을 주겠느냐, 그냥 내가 다 지불하는 거지, 남편의 답에 그는 아르바이트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루 일을 못하고 거기에 매달렸는데 안받으면 어떡하냐고 받으라거니 안받는다거니 옥신각신했다. 그는 자기에게 줄 아르바이트비를 교회에 헌금하라고 하여 그리 하였고, 파리의 해프닝은 끝났다.
선원은 거제도 출신이었다. 파리에서 찍어준 사진을 아들에게 보내달라고 아들 주소를 남겼다. 사진을 인화하여 선원 아들에게 보내고, 아버지는 라스팔마스에 잘 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선원이 라스팔마스에서 일을 잘하고 있다가 귀국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잠시 스쳐간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선원은 평소에 많은 덕을 쌓고 살아왔던 것같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이 뻗쳤으니 말이다.
고국을 떠나와 낯선 외국에서 동포를 만나면 우선은 반갑다. 만남이 귀찮은 일이 될지, 즐거운 시간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행히 작은 일이나마 여행객을 도와줄 수 있다면 기분좋은 만남이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도 달라붙어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을 만나면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