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 에피소드
이름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
옆집에 프랑스 남자와 콜롬비아 여자 부부가 살았다. 부부에겐 다섯 살 짜리 딸과 첫돌이 안된 아들이 있다. 딸 이름은 프랑수아즈Françoise. 가정에서는 부모와 함께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유치원에서는 독일어로 생활한다. 엄마가 이웃들과 영어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 배웠는지 프랑수아즈는 나를 만나면 영어로 인사를 한다. 대화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헬로나 하이, 굿모닝 정도의 인사말이다.
"헬로, 헤이!" "하이, 헤이!"
이름에 들어있는 은혜 혜惠자를 영문 알파벳으로 "HEY"라고 썼더니 "헤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히 어른 이름을 이름이라고도 못하고 '성함'이라고, 더 높이면 '존함'이라고 하며 어른 김철수를 "김자, 철자, 수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섯 살 짜리 꼬맹이가 감히 나이 40넘은 나에게 '헤이' '헤이' 하다니. 헤이는 물론 나의 이름인데 마침 영어의 헤이hey(어이! 이봐!)와 같아서 어린애가 어른에게 말할 땐 무례하게 느껴진다.
우리말엔 반말(Casual/ Informal)과 존댓말(Polite/ Formal )이 있다. 연령이나 위계질서에 따라 적절히 사용한다. 친밀함과 거리감에 따르기도 한다. 우리말에 상대를 부르는 이인칭 명사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영어는 주로 "유You"를 사용한다. 독일어에서는 "두Du(너)"와 "지Sie(당신)"가 구별돼 있다. 문어적인 표현을 떠나 실생활에서 사용할 때는 반말 존댓말의 개념이 아니라 친밀감과 거리감의 차이로 나뉜다.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두Du"라고 하는 일은 흔하다. 독일에서 "두쩬Duzen"이라고 한다. "지Sie"는 주로 문서나 공식석상에서 쓰인다. (두쩐, 두쯘, 두쩬,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어느 것도 독일 발음과 같지는 않다.)
우리는 초면에 존댓말을 하다가 얼마 지나 친숙해지면 "우리 말 트고 지냅시다." "말 짧게 하자." "말 줄이자."라고 하며 반말을 하게된다. 예의를 벗어난 말이 아니라 친밀감의 표현이다. 독일에서도 그렇다. 낯선 나라에서 한껏 말조심하느라고 이웃에게 "지Sie"로 말하면 몇 마디 주고받은 후에 상대방이 두쩬Duzen하라고 한다. 우리 사이에 왜 자꾸 지쩬Siezen 하느냐고, 편하게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흔하다.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 이웃 어른을 가리지 않고 이름으로 부른다. 옆집 딸 프랑수아즈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내 기분만 어색할 뿐, 그 아이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집 바깥에서 마주칠 때마다 프랑수아즈는 나에게 "하이, 헤이"하며 인사한다. 우리는 가족끼리 농담으로 "아니 어린 것이 얻다 대고 함부로 헤이 헤이야" 하면서 웃는다.
프랑수아즈의 엄마는 남편을 "아모Amor"라고 부른다. 정원에 나와 있을 때 남편을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짧은 대화중에 남편을 지칭할 때 "아모"라고 했다. 어느 날 옆집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없었다. 인사차 '아모는 나갔나봐요' 했더니 부인(이름을 잊었다)은 의아한 표정으로 "빠동Pardon?"하는 것이 아닌가. 상대방이 내 말을 못알아들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증세가 있다. 그녀가 다시 "빠동?"한다.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달래며 "당신 남편이요."했더니...
프랑수아즈 엄마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어제쳤다. 왜 그러지, 이거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내가 잘못했나보다. 안할 말을 한거야. 내 가슴은 더 바쁘게 뛰었다. 맙소사, 아이구 맙소사! "아모"는 프랑수아즈 아빠의 이름이 아니었다. 남편을 부르는 애칭 이었다. "아모르Amor"였다. 나도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amore mio" 이런 노래를 아는데 애칭 "아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r이 문제다. 프랑스인들이 r발음을 하는지 안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한국에 사는 지인중에 국제결혼 부부가 있다. 남편은 한국인, 아내는 외국인이다. 남편이 아내를 "꿀, 꿀, 꿀"하며 부른다. 곁에 있던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내를 돼지 취급하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오해였다. 그들 부부에겐 "꿀꿀꿀"호칭이 즐겁고 사랑스러운 애칭이었다. "허니, 허니 honey"를 한국말로 "꿀꿀꿀"이라고 바꾼 것이다. 남편이 자기를 "꿀꿀꿀"하고 부르면 아내는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꿀꿀꿀!" "허니 나 여기써(여기 있어)."
딸과 함께 독일어학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강사의 가르침 중에 "헤르 헤벌레(헤벌레 씨)"라는 이름이 나왔다. 딸과 나는 같은 클라스였는데 내가 뭘 잘못들었나해서 얼른 딸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딸의 표정도 이상했다.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로 마주보며 킥킥거렸다. 강사는 우리에게 왜 그러느냐고 무엇이 잘못됐냐고 물었지만 딸도 나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헤벌레라는 이름 때문에요' 이렇게는 말할 수는 있지만 '헤벌레'라는 단어가 우리 한국에서는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다. '헤르벨레'라고 들리기도 하고 '헤벌레'라고 들리기도 한다. 우리 강사의 발음은 거의 '헤벌레'와 같았다. 아, 성이 헤벌레라니!
우리는 외국어 발음과 우리말 발음, 그 뜻이 빚어내는 재미있는 현상을 보게된다. 몇가지 예를 꼽으며 농담을 하기도 한다. '강'씨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에 간 강씨가 Gang으로 하자니 '갱(깡패)'과 같아서 Kang으로 썼더니 미국인들이 자기를 부를 때 캥캥거리더란다. 박씨는 또 어떠한가. Bag이라하면 박씨가 아니라 백씨가 될테고, Pag이라하자니 사람들이 팍팍이나 팩팩이라 부를 것이다. 박씨를 나타낼 수 있는 '박'과 같은 모든 단어를 다 동원해보자. Back(뒤), Pack(보따리), Bark(나무껍질), Park(공원), 이런 단어들이 있다. 우리들은 심심할 때 이런 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우리 아들은 이름이 준(Joon)인데 독일로 가니 윤으로 바뀌었다.
프랑수아즈가 부르던 "헤이"도, 내가 오해했던 "아모"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던 "헤벌레"도 즐거운 에피소드고 지나간 그 날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