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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27. 2024

입국, 빈 집에 들다.

독일생활 에피소드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거실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과 화장실에 새 화장지 롤 하나 걸려있는 것, 그것이 다였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그렇게 빈 집에 화장지 롤 하나 걸어둔 마음은 큰 배려다. 먼저 살던 사람의 마음이 화장지 롤에 남아있었다. 내가 이사 나올 때는 화장지와 비누와 수건을 남겨 두고 나왔다. 


한국에서 아이들 다니던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독일 지원한 학교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고, 독일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한국을 떠났다. 입국하여 구청(Landratsamt) 시청(Rathaus) 주민센터(Einwohneramt)를 다니며 입국신고와 거주자 등록을 했다. 모든 곳은 사전 예약을 해야하는데 바로 내일 되는 것은 아니다. 전기, 수도, 전화를 신청했다. 그럼 다 된 것인가. 시청에서 거주자 증명서를 발급받아 여권과 함께 가져가 은행 계좌 개설을 했다. 그곳에서 살기 위해 필수로 해야할 일을 다 마치는 데 며칠이 걸렸다.


독일 지인이 우리가 살 집을 얻어놓고, 가구들도 예약해 놓았다. 그 분이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우리는 호텔에서 오래 묵어야 했을 것이다.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 집에 가봤다. 집 앞에서 깜짝 놀랐다. 서울 우리 아파트와 같은 번지 수. 우연이다.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면서 또 깜짝 놀랐다. 집안에 아무 것도 없었다. 텅 빈 거실 천장에 갓도 없는 백열등 하나가 매달려 있을 뿐. 세상에 이럴 수가! 정신이 아찔했다.

한국에서 우린 거의 아파트에 살면서 이사도 몇 번 했었다. 주방에 붙박이 싱크대가 설치돼 있는 게 당연했다. 내 마음대로 다시 바꾸더라도 기본으로 싱크대는 붙어있다. 그건 집에 속한 것이다. 거실 장이 있는 아파트도 있다. 독일집, 우리가 살게 될 집에는 싱크대가 없었다. 거실장도 없었다. 텅텅 빈 집이다. 싱크대가 없는 집이라니! 가구를 다 갖춘 임대주택도 있겠지만 우리집은 빈집이었다.

집 구조도 생전 처음 보는 구조다. 폭이 좁은 집인데 현관에 들어서니 거실과 부엌과 작은 화장실이 있다. 방은 어디지. 어리둥절했다. 이층에 목욕탕과 화장실과 침실 두 개, 삼층에 커다란 방과 작은 방, 지하에 세탁실과 방 하나가 있는 구조다. 집을 구해준 지인 말로는 이층은 침실, 삼층은 취미실, 지하는 작업실과 사무실로 사용하란다. 

며칠동안 호텔에 묵은 후 가구가 배달되는 날 집으로 들어갔다. 가구만 들어왔지 밥그릇도 숫가락도 없었다. 지인의 안내를 받아 그릇을 샀다. 예상보다 훨씬 비싸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살면서 알게됐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싸고 쓸만한 그릇들도 많은데, 그냥 보통 그릇이 우리 형편에 더 맞는데, 그 분은 자기 레벨 대로 우리에게 소개해 준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집 전체 4개 층을 오르내리며 본의 아닌 집안 등산을 했다. 2층 침실에서 자고 씻은 후, 지하실 세탁장에 내려가서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1층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하여 부엌 작은 식탁에서 먹든지, 부엌문과 거실 문을 거쳐 거실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지하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고, 다 된 빨래는 3층으로 가지고 올라가 다림질을 한다. 이런 식으로 하루종일 4개 층을 오르내리며 살림을 했다. 여기서 1층 2층 3층이라 함은 우리나라식 층수를 말한 것이다. 독일은 건물 층수를 세는 방법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의 1층에 해당되는 '땅층(Erdgeschoss)'이 있다. 땅층 위에서부터 1층(우리의 2층)이 시작된다. 

처음에 어학원을 찾아 갔을 때 골탕먹었다. 2층이라 하여 올라갔는데 학원이 없는 것이다. 내려와서 건물 주소를 확인하고 다시 올라갔다. 주소는 맞았다. 건물에는 학원뿐 아니라 다른 사무실 간판도 전혀 붙어있지 않았다. 분명히 2층이 맞는데 학원이 없어서 난감했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3층에서 내려오길래 올라가 봤다. 학원은 3층에 있다. 엘레베이터도 없는 건물이다. 엘레베이터가 있었다면 숫자 2를 누르면 됐을 걸. "L(lobby)"이나 "E(Erdgeschoss)" "0"이 있는 것을 보고 곧바로 알았을 텐데 엘레베이터가 없으니 오르내리기만 했다. 무슨 건물에 간판 하나도 없단 말인가. 호텔에 묵을 때 독일에는 "0층" "땅층(Erdgeschoss)"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학원 건물에 가서는 그 생각이 잠깐 외출나간 상태였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거리에서 간판붙인 건물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었다. 간판공해에 시달리던 한국거리보다 쾌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내가 불편을 겪으니 '간판을 왜 안 걸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퉁이 집이 좋았는데...

우리 집은 연립주택(Reihenbau/ Reihenhäuser)의 제일 가장자리(Ecke) 집이었다. 정원의 앞면과 옆면이 길에 노출됐다. 정원과 길의 경계는 얼기설기 엮은 낮은 철망, 구멍으로 테니스공이 드나들 정도로 성긴 철망이 둘러쳐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가 자주 공이 정원으로 날아들어와 꺼내줘야 한다. 아이들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높이라 그저 꺼내가면 되련만 절대로 그냥 넘어오지 않는다. 꼭 나를 부르고 공을 꺼내가겠다고 하고난 후에 펜스를 넘어온다. 무엇에 부딪쳐 철망의 구조가 어긋났는지 군데군데 엮은 짜임이 헝크러지곤 했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참 좋았다. 집에 혼자 있는 긴 시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좋기도 하지만 가끔은 적막한 느낌도 든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생기가 돋는다. 어느 날, 간호원으로 일하는 지인이 놀러왔다. 늘 그렇듯이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공이 넘어왔다. 그것이 일상이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땐 즐겁기도 한데, 그 분은 아이들을 큰 소리로 혼냈다. 그리곤 하는 말이 "이러니까 에케집은(Eckhaus모퉁이집) 나쁘다니까."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이웃 아이들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뜀박질이 눈에 선하다.

 

작은 잔디밭에 어느 날은 까마귀들이 떼지어 날아들고, 봄이면 노오란 민들레 꽃도 피고, 잔디깎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면 이끼가 자랐다. 하루는 주말인데 한 가족을 초대해서 바베큐를 하기로 했다. 거실에서 뜰로 나가는 커다란 유리창을 열려고 보니 밖에 안개가 뿌옇게 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안개가 아른아른 움직인다. 문을 바로 열지 않고 유리를 통해서 밖을 자세히 내다보니 벌떼가 몰려온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낱개를 구별할 수 없이 전체가 한 덩어리의 구름뭉치같은 벌떼가 윙윙거렸다. 방문한 남자분이 옆집에서 긴 호스를 빌려오라고 했다. 큰일날 뻔했다. 호스를 빌려다 물총을 쐈으면 우리는 벌떼에게 습격당할 뻔했다. 옆집에 다녀와 보니 우리 정원에 우주인 3명이 착륙한 것이 아닌가! 우주복같은 것을 입고 머리엔 어항을 뒤집어 쓴 것같은 차림의 소방관이 온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신고를 했단다. 소방관들은 벌들과 싸우지 않았다. 벌통을 몇 개 들고와서 마당에 두고 갔다. 얼마 후에 와서 벌통을 가져갔다. 벌 소동은 그렇게 끝났다.

정원에 저절로 난 민들레를 캐서 봄나물을 해먹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타고 정원 여기저기에 날아다녔다. 


항온과 방음이 잘된 지하실

지하실엔 세탁기와 건조기를 두었다. 벽쪽으로 나무 선반을 짜놓고 잡동사니를 올려두었다. 독일 사람들은(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지하에 와인을 저장한다. 저온에 사철 별다른 변화가 없는 지하실이다. 와인저장고로 적당하다. 아는 집에서 봤는데 그집은 지하에 쌓아 둔 와인이 제법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보았던 하수도 배관, 벽돌색 화분과 같은 재질로 된 짧은 관에 와인을 한 병씩 넣어 쌓아놓았다. 굳이 전자제품 와인저장고가 필요 없는 것이다. 점토관 속에서 값비싼 빈티지 와인이 세월을 보내고 있겠지만 나는 우리나라 시골집에 있었던 벽돌색 하수관이 생각났다. 

지하실이 넓어서 방학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빌려온 악기를 들여놓고 놀았다. 방학 때마다 학교에서는 악기를 가정집에 빌려준다. 개학 때 반납하면 된다. 전자기타 볼륨을 마음껏 올리고, 드럼을 두드려대고, 트럼펫을 불고, 요란한 연주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 지하실이다. 걱정이 돼서 밖에 나가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평균적인 TV소리 정도였다. 옆집에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모퉁이집이니 길가는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리겠지만 무심코 걸어가는 사람들은 못듣고 지나갈 정도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휴식시간(Ruhezeit)만 지키면 된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연주한 음악을 녹음테이프에 담고 "켈러뮤직Keller Musik"이라고 제목을 써붙였다. 

지하실에 있는 방은 가끔 들르는 남편의 사무공간이다. 컴퓨터가 있지만 인터넷은 안되던 시절에 그 방에 팩스가 있었다. 정말 옛날 이야기, 30년전 일이다. 팩스는 나를 많이 도와줬다. 대면하면 의사소통이 되지만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외국어는 듣는 즉시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발음이 얼마나 엉망인지 상대쪽에서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경우도 있었다. 호텔이나 식당 예약 정도는 직접 통화를 하지만 긴 대화가 이어질 곳에는 팩스를 보냈다. 체크할 것이 많은 캠핑장에 대한 질문이나 이것저것 관공서에 문의를 할 때 내 신분을 밝히고 해야할 말을 종이에 써서 팩스를 먼저 보낸다. 몇시에(물론 시간차를 두고) 전화하겠다는 것까지 써넣는다. 그 시간이 되어 전화를 걸면 상담하기도 전에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있다. 통화할 때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진다. 무식한 사람의 궁여지책이었다. 


와인을 저장한 점토관 Tonröhre


별이 쏟아지는 다락방

2층(한국 3층)엔 넓은 방과 작은 방이 있다. 작은 방에는 재봉틀과 다리미판을 두었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천창으로 자연광이 들어와 그림그리기에 좋은 환경이다.  넓은 방은 아들들이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해방공간이다. 밤이면 천창으로 별이 쏟아지는 낭만적인 다방이다. 저희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브로마이드를 천장에 붙여놓았다. 바닥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며 브로마이드에서 내려다보는 가수와 눈을 맞추고 그의 음악을 듣곤 하던 방이다. 

2층은 항상 난장판이다. 아들들 방에 들어가면 늘어놓은 물건들 사이를 징검징검 건너며 걸어야 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잘도 찾는다. 보다못해 학교간 사이에 정리를 좀 해주면 나중에 뭐가 어디 있는지 찾느라고 수선을 떤다.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하는 경고가 떨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누워 뒹굴거리는지... 내가 사용하는 방도 아들방 못지않게 늘어놓고 살았다. 바느질, 뜨게질, 다림질, 그림그리기, 만들기, 이것저것 하다보면 방안 가득 물건들이 널려있다. 그렇게 늘어놓고 무얼 하다가 끝날 땐 치울 걱정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된다. 침실 거실 식당 외에 따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게으른 나에게는 진정한 해방공간이었다. 

지금 집은 어떠한가. 그리기나 만들기를 하려면 책상보다 넓은 식탁에서 해야하고, 식사시간이 되면 식사 준비보다는 식탁을 치울 일이 더 귀찮다. 거실에 물건들 벌려놓고 일하면 빨리 끝내고 정리해야 한다. 마냥 늘어놔도 스트레스 없는 독일집 다락방이 그리워진다. 


이사 들어갈 때, 이사 나올 때

집 빌리는 계약서를 보는 순간 기가 팍 질린다. 마치 석사논문집 정도의 두께에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하다. 잘은 못해도 익숙한 영문이 아니라 독일어로 적혀있다. 앞이 깜깜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집을 얻었지만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은 거주자인 나다. 별별 내용이 다 써있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신고해야 하고, 나중에 이사 나갈 때는 원상복귀해야 하고(이건 당연하지), 계약서에 없는 사람에게 재임대하면 안된다는 내용, 기타 등등. 우리가 주차장을 쓰지 않을 때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라고 허락해줄 수는 있다. 다만 그 사람에게 돈을 받으면 안된다. 재임대가 되끼 때문에 계약 위반이 된다. 보증금은 3개월치 월세를 내고 이사나간 후 3개월 후에 돌려준다. 혹시라도 집에 문제가 있으면 보증금에서 수리비를 제하고 돌려준다. 벽은 흰색 페인트칠을 새로 해야 한다. 커튼봉을 뗀 후에 구멍을 완전히 메꿔야 하고, 전등 설치로 구멍난 곳도 다 메꿔야 한다. 어쨌든 완벽히 새집처럼 만들어놓고 처음처럼 전등 하나만 남겨두면 된다. 퇴거 때 원상복귀만 하면 사는 동안에 집에 별짓을 다 해도 된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집 내부에서는 자유다. 자유가 보장되는 대신 책임도 철저하다. 

한 한국가정에서 이사할 때 집 검사받는 꿀팁을 알려주었다. 카펫 물세탁한 후에 완전히 마르기 전에 검사를 받으라고. 혹시 얼룩이 있어도 물기가 덜 마르면 잘 표가 나지 않는다고. 

2층 욕실 천장에 약간 곰팡이가 폈다. 집이 습해서 곰팡이 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인은 내가 환기를 잘 안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겨울에 추운데도 부지런히 창문을 열었어야 했나보다. 철저한 집 검사가 끝나고 우리는 몇 가지 보상을 해야 했다. 잔디밭에 잡초를 뽑지 않아서 잔디가 망가졌으니 새로 깔아야 한다는 것. 민들레가 많은데 그게 잡초니까. 잔디깎기에 게을러서 이끼가 많이 끼었는데 그것도 잔디를 새로 깔아야하는 이유였다. 집 정원 경계로 둘러친 철망이 몇군데 망가졌는데 그것도 보수해야 했다. 어찌 그리 까다로운지 야속했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철저한 집 검사를 다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갈 때도 벽은 병원처럼 새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카펫은 손톱만한 얼룩 하나도 없었고, 집 어느 구석에도 티끌만한 먼지 한 조각도 없었으니까. 유리창은 유리를 끼웠나 안끼웠나 모를 정도로 깨끗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놓고 그 집을 떠났다. 들어갈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화장실에 애초 있던 대로 화장지 한 롤에다 비누와 수건 하나를 더 남겨놓고 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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