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 에피소드
독일학교 교육에 대한 글이 아니다. 독일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쿨 이야기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이고, 또 다른 국제학교 생활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큰 아들이 중3, 작은 아들이 중1. 한국에서 1학기를 마치고 가을에 시작하는 독일 학기에 맞춰 입학했다. 외국어를 작은 아이는 1학기의 영어 교육만 받은 상황이었다.
독일로 가기 전부터 막내아들은 영어를 잘(?)했다. 남편에게 가끔 외국인이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어머니는 '여보세요'하고 받다가 외국인이면 무조건 초등학생인 아이에게 전화기를 강제로 넘겼다. 어머니는 외국말을 무서워하셨다. 막내 아들은 전화를 받으면 태연하게 큰 소리로 말한다. "미스터 윤 노 하우스."라고. papa, daddy, father, 이런 단어를 쓰지도 않는다. 전화 건 사람이 Mr. Youn을 찾으니 그대로 따라서 미스터윤이 집에 없다고 답하는 것이다. '집에 없다'를 '노 하우스'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갔다. 중3인 큰 아들이 김나지움(Gymnasium)에 갈 수 없어서 레알슐레(Realschule)로 가야 했다. 김나지움은 5학년부터 13학까지인데 졸업시험인 아비투어(Abitur)를 하고 대학진학을 하려면 10학년 수료 인정을 받아야 전학할 수 있었다. 9학년인 외국아이가 김나지움으로 전학하는 것은 어렵다. 레알슐레는 중등교육으로 일종의 직업학교인데 직업전문학교(Berufliches Gymnasium)보다 낮은 중등교육이다. 아들은 대학에 갈 계획이어서 레알슐레에 가기 싫었다. 인터내셔널 스쿨에 입학한 중요한 이유이다. 대학을 가기 위하여.
학교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놀기에 더 집중했고, 그 방법이 외국생활 적응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언어를 익히는 속도도 빨랐다. 아이들은 한국에서보다 공부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배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아들은 한국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큰 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책에 파묻혀 살았다. 글도 재치있게 썼다. 작은 아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았다. 설계도를 그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다. 우리 생각은 큰 아이는 문과계열, 작은 아들은 이과계열이 적성에 맞고 그렇게 전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국에서 계속 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전공을 택하고 진학했을 것이다.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전공을 정했다.
학교 공부중에 큰 아이는 과학계통에 흥미를 느꼈고, 작은 아이는 문학계통에 관심을 가졌다. 국제학교에서 대학진학하려면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인터네셔널 바칼로레아) 과정을 공부한다. 하이레벨 3과목, 스탠다드 레벨 3과목, 그리고 CAS(Creativity, activity, service 창의성, 활동성, 봉사)과목이 필수이다. 시험점수 등급은 1에서 7까지인데 7등급이 제일 상위등급이다.
큰 아들은 하이레벨로 물리 화학 수학을, 스탠다드 레벨로 영어 국문학(한국문학) 미술을 선택했다. CAS에서는 음악밴드(트럼펫)와 암벽등반, 한국학생 보조교사를 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 영국항공사 주최 미술대회에 나가 최고상을 받았다. 상품으로 브리티시 항공사 비즈니스석 티켓을 두 장 받아 동생과 함께 영국 여행을 다녀왔다. 미술선생님은 큰 아이가 선택한 하이레벨을 보고는 한 과목은 미술로 바꾸라고 권했다. 큰 아이의 하이레벨 선택은 확고했다. 문제의 답이 확실한 것이 좋지 문학이나(주관식) 미술처럼 답에 변수가 있는 것은 싫다는 것이다. 하이레벨 공부가 어려우니 미술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고싶다고. 미술을 하이레벨로 선택하여 즐거운 미술활동이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싫다는 논지였다. 사실 미술 하이레벨은 많이 어렵고 까다롭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 계획, 구상에 따른 제작, 완성 후 작가노트, 모든 작품마다 꼭 에세이를 써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의문이 들지 않는가? 국제학교에서 IB코스로 어떻게 국문학을 선택했는지. 담임 선생님의 권고에 따랐다. 그 선생님 지론은 모국어를 잘해야 외국어도 잘하고 모든 학문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 아이들에게만 그런 권고를 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 학생들 모두에게 항상 모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분이다. 물론 학교에 한국어 선생님은 안 계셨다. 학교의 주선으로 레겐스브루크 대학에 있는 한국문학 교수가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에 오셔서 가르쳤다. 우리는 이런 일에 감탄하고 감동했다. 작은 아들도 국문학을 스탠다드 레벨로 선택하여 함께 배웠다. 독일에 살면서 한국문학 소설과 시를 공부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두 아들은 고등학교 과정중에 한국소설 30권을 읽었다. 큰 아들의 문학 에세이는 "한국 소설 속의 가난"에 대한 것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수업을 맡으신 대학교수가 우리 아이들 국문학 IB를 지도할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인도네시아 국제학교에서 국문학 IB과정을 가르치는 한국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는 ZOOM교육이 없던 때라 팩스를 주고받으며 지도받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큰 아이는 물리 화학 수학 하이레벨 세 과목을 모두 최고 등급인 7을 받았다.
작은 아들은 하이레벨로 영어 역사 화학을, 스탠다드 레벨로 미술 수학 국문학을 선택했다. CAS는 밴드(드럼)와 축구, 난민캠프 봉사였다. 화학을 선택한 이유는 독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자연과학 1과목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화학은 정말 못하는 과목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큰 아이가 제 동생을 붙들고 가르치는데 도대체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이해했니?" "응 알겠어." "그럼 이 문제 풀어봐." 작은 아이는 문제를 못풀거나 틀리게 푼다. "다 이해했으면 풀어야지 왜 못풀어?" "아까는 다 알았는데 문제는 풀기 어렵네." "그럼 이해를 못한거지 왜 이해했다고 해?" 형제의 티격태격에 내 가슴이 타들어갔다.
"이해했으면 어떤 문제든지 다 풀어야 한다."는 것이 큰 아들의 생각이다. 믿거나 말거나 큰 아들은 수학문제집 단 한 권도 풀어보지 않고 시험을 치렀다. 딸은 한국에서 고3때 모의고사 문제집이 닳고 닳도록 연습했다. 그것도 여러 권의 문제집을. 그렇게 공부해야 시험을 잘 봤다. 큰 아들은 공부를 딸처럼 열심히 하지 않아 은근히 애를 태웠는데 결과는 큰소리 친대로 잘 나왔다. 다행이다.
작은 아들은 대학진학을 독일에서 영국으로 바꿨다. 이미 큰 아들이 영국으로 가있어서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IB결과가 나오기 전에 대학지원서를 냈는데 지원한 영국 대학에서 조건부 입학허가를 받았다. 하이레벨 과목을 모두 5점 이상 받아야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영어와 역사는 최고 등급인 7을 받았고 화학은 4를 받았다. 대학에서 제시한 조건에 못미쳤다. 안타까웠다. 애초에 영국대학에 갈 계획이었으면 화학을 선택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작은 아들은 원하는 대학에 못가고 다른 곳으로 가야했다. 크게 실망했고 집안은 우울한 분위기로 가라앉아 있었다. 다른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아들은 처음 지원했던 대학에 가고싶어 했다. 그 대학 학장의 저서를 탐독하고 공감했기 때문에 꼭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작은 아들 조건을 맞추지 못해 떨어진 대학에 편지를 냈다. (아들에게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솔직히 나는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사회학과를 지원했다. 화학을 하이레벨로 선택한 것은 독일대학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화학은 조건에 맞는 점수를 못받았지만 하이레벨 두 과목을 7 받았다. 사회학을 공부하는데 영어와 역사가 7등급인 학생이 화학을 4등급 받았다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생각하여 학교에 받아주면 열심히 공부하겠다. 기든스 교수님과 함께 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기회를 달라. 이런 내용의 항의와 호소가 뒤섞인 편지를 보냈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우리에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에서 답장이 왔다. 작은 아들의 사회학과 입학을 축하한다는! 그렇게 대학에 합격한 작은 아들을 우리는 네가 꼴찌로 입학한 거니까 열심히 해야한다고 놀려댔다. 두 아들들, 우리집에서는 한 놈은 제국주의자, 한 놈은 사회주의자라고 놀린다. 큰 아이의 대학교 이름과 작은 아들의 전공학과를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독일에 갈 때 5년 계획이었는데 작은 아들이 중2에서 고1로 월반하는 바람에 우리는 4년만에 독일을 떠날 수 있었다. 다시 외국 생활, 영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지내는 4년동안은 한국과 런던을 오가는 유랑생활이었다. 자칭 국제파출부인 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