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 에피소드
외국생활에서 한인회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의 소속감과 연대, 실생활의 정보와 도움, 언어 스트레스 없는 사교, 어떤 이유에서든 한인회에 소속되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정체성이 굳어진다.
우리는 한인회에 속하지 않은 상태로 변두리에서 조용히 살았다. 동네 수퍼마켓에 갔다가 우연히 한국 간호원을 만나 서로 오가며 지내는 관계가 되었다. 아이들은 한국 학생이 전혀 없는 곳에 우리 아들 둘만 입학했었는데 다음 해에 4명이 또 들어왔다. 두 가정이 이사 온 것이다. 자연히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주말이면 서로 오가며 맛있는 음식 나눠먹고,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영어로 떠들며 놀고,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한국어로 수다떨며 놀았다. 내가 그렇게 수다쟁이였던가? ㅇㅇ엄마가 정말 수다쟁이네! 옛날 한국에서의 이야기, 독일 와서 겪은 이야기, 아이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의 샘은 깊고 깊었다. 모국어의 편리함이란!
소파에 점잖게 단정히 앉아 있다가 얼마 후 시간이 지나면 우리 여자들은 두 다리를 소파 위에 올려놓고 책상다리를 하든지, 바닥에 앉아 두 다리 쭉 뻗고 소파에 등을 기댄 자세로 바뀐다. 독일에서 산 소파에 등을 기대면 우리 무릎이 소파 끝보다 안쪽에 위치한다. 등에 쿠션을 대로 앞으로 내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독일 소파가 체형에 맞지 않게 컸다. 독일 지인이 우리가 가기 전에 예약해 둔 소파였다. 우리보다 덩치가 큰 독일인이 골라준 거창한(?) 소파였다. 간단한 모던 스타일 소파를 샀어야 했는데... 어쨌든 우리 여자들은 커다란 소파에 품위없는 자세로 올라앉아서 교양인가 뭐 그런 건 다 내던져버리고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주말을 지내고 다시 독일사람들 속에 끼어들어 애쓰며 독일말을 했고, 정 답답하면 그보다는 좀 나은 영어를 했고, 어색함의 꺼풀을 하나씩 벗어가며 지냈다. 4년 후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갔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는 영어가 막히고 독일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요상한 현상이다.
한 가정은 대학교수의 안식년을 이용해 독일에 왔고, 또 한 가정은 독일회사 직장인이었다. 우리집 가장은 한국에서 딸과 장모와 함께 살며 유럽출장을 일년에 반쯤 다니는,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일년에 반 밖에 함께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의 부재중에 위의 두 남편들이 우리를 형제의 가족처럼 보살펴주었다. 주말에 시장갈 때 데리고 다니고, 근교에 나들이할 때 데리고 다니고, 우리가 그분들께 많은 부담을 주었다. 항상 그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세 가정의 아이들 중에 우리 아들들이 가장 나이가 많아 윗 학년이었다. 그 분들 보기에 우리 아들들 학습진도나 언행이 자기네 아이들이 따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나보다. 아이들이 모여서 함께 놀 기회를 많이 마련해 주었다. 진심으로 우리 두 아들을 사랑해주셨다.
수퍼마켓에서 만난 이웃은 파독 간호원으로 독일인과 결혼하고 수십년을 독일에서 사신 분이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크신 분이다. 한국 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애썼다. 종종 집에서 파티를 열어 한인 모임을 했다. 우리집과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았다. 나를 만날 때마다 '독일에서는 이러이러하다'고 독일 생활을 자세히 알려줬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한다고. 독일에 대하여 뭐든지 물어보고, 모르면 의지하고 그래야 그 분은 만족할 성격이었다. 남에게 필요한 인간이 되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인지, 오지랖의 만족인지, 독일인 다운 자신의 자랑스러운 지배력인지 모르겠으나 나와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모르는 일이라도 꿍꿍이 속으로 더듬으며 해나가고 그분께 의지하지 않았다.
우린 자동차가 없었다. 그 분은 항상 자기 차를 이용하라고 했지만 먼저 부탁하여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병원에 입원할 때도 아들이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갔다. 병원 진료신청, 진료중 의사의 설명듣기, 입원후 병원생활, 모든 절차를 독일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중학생 아들에게 나를 맡겼다. 한국에서라면 중학생이 못할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독일 병원 시스템이 낯설 뿐이었다.
그 분이 간호원으로 근무하는 병원이다. 우리가 부탁을 안해도 내가 아픈 것을 알면 먼저 앞장서서 모든 절차를 척척 도와줄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간호원을 부르지 않았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적응하고 이겨내고 성장하도록 자식을 가르치는 역할이 내 몫이다. 만약 즉시 그 분께 연락하여 편리하게 입원하였다면 아들은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도와줄 누군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당시에 제가 엄마를 직접 입원시키는 일을 해봤으니 또 다른 일이 생겨도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스스로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끈끈한 성격을 가진 그 분은 나중에 우리 큰 동서를 만났을 때 나에 대하여 좋지않은 평을 했다고 한다. 인정머리 없고 냉정한 여자라고. 주는 마음을 온전히 받지 않아서 인정이 없다는 것인지...
다가갈 때와 멈출 때, 함께 있어줄 때와 혼자 놓아줄 때,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지혜있는 관계를 원한다. 필요할 때 찾고 필요없을 때 버리는 관계와는 다른 차원이다. 관계의 '유지'에 방점이 찍혀있다.
낯선 나라에서 동포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동류항으로 묶을 수 있는 개체들. 그러나 그 괄호 속의 개체들이 서로 다름은 모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