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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추의 경계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by morgen

5부 예술의 경계 - 실제 작품 중심

22화 미와 추의 경계 -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미술관에 들어설 때, 은연중에 아름다움을 기대한다. 정제된 색채, 조화로운 선,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과 인물들. 미술은 원래 곱고 예쁜 것만 담아야 한다는 오래된 관습이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그러나 모든 캔버스가 눈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화면 앞에 서는 순간 불편함이 스며들고, 외면하고 싶은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예술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혹은 갈라진 적이 있기는 한가? 고대의 철학자들은 미를 조화와 비례에서 찾았지만, 근대와 현대의 화가들은 경계를 흔들며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미와 추는 대립하는 적이 아니라, 경계 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두 얼굴이 된다.


인간은 오래도록 아름다움을 갈망해왔다. 플라톤은 미(美)를 이데아의 한 형태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빛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는 질서와 비례, 조화의 산물이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황금비율을 따라 얼굴과 신체를 그리며, ‘완벽한 아름다움’을 화면 위에 소환하려 했다. 미란 언제나 균형과 빛, 눈을 기쁘게 하는 조화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그 경계 바깥을 기웃거렸다. 삶이 반드시 고운 선과 빛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듯, 예술 또한 고통과 불협화음,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예술은 스스로 묻기 시작한다. “아름답지 않은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절대적 조화의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

라파엘로는 르네상스가 꿈꾸던 이상적 아름다움의 완벽한 구현자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언제나 균형 잡힌 얼굴과 신체를 지니고, 화면은 황금비율의 질서 안에 정연히 배치된다. 아테네 학당에서 철학자들은 질서정연한 원근 속에 서 있고, 성모자상 속 성모의 얼굴은 한 치의 왜곡도 없는 부드러운 조화로 빛난다.

라파엘로의 세계에는 고통의 흔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추는 배제되고, 아름다움만이 남는다. 그의 그림은 신적 조화의 이상을 담은 성전(聖殿)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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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아름다움의 고수,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세기가 바뀌며 예술은 점차 불협화음과 현실의 어두운 면을 향해 나아갔지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끝까지 아름다움을 놓지 않았다. 그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화와 문학 속 여인들을 낭만적으로 형상화했다. The Lady of Shalott, Ophelia와 같은 작품에서 인물은 언제나 고운 자태와 섬세한 표정을 지니며, 화면은 부드러운 색조로 가득하다.

워터하우스의 그림에는 사회적 고통도, 불편한 현실도 없다. 그가 추구한 것은 낭만적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 아름다움은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꿈의 장막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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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율

사람들이 흔히 “가장 아름다운 비율”이라고 부르는 게 황금비율이다. 수학적으로는 약 1:1.618 정도인데, 쉽게 말해 긴 쪽을 짧은 쪽으로 나눈 비율이 전체를 긴 쪽으로 나눈 비율과 같을 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종이를 길게 잘라냈는데, 작은 종이가 원래 큰 종이와 닮아 있는 비율을 가지는 경우가 바로 황금비율 구조다. 신용카드, 명함, 컴퓨터 모니터 등에서 황금 비율과 유사한 1:1.618 비율이 활용되어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고대 그리스 건축물인 파르테논 신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자연 속의 소라 껍데기해바라기 씨 배열에서도 이 비율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이 비율에서 조화와 균형을 느끼기 때문에 미술·건축·디자인에서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미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는 하나의 패턴이라고 보는 편이 더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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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체를 황금비율로 강조한 모습. (출처: 라파엘 타마르고/존스홉킨스 수정)


고통의 형상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20세기, 프란시스 베이컨의 캔버스 앞에 선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와 마주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곧바로 균형과 조화의 세계에서 밀려난다. 그의 캔버스에는 짓눌린 신체, 비명처럼 찢겨진 얼굴, 고통에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이 자리한다.

베이컨은 결코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외양을 사진처럼 재현하는 대신,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찢어진 살과 왜곡된 근육 속에 새겼다. 그의 붓질은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잔인할 만큼 솔직하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고통·불안이 그의 그림 안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예술은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그 자체가 상처의 봉합이 된다”라고 말했다. 베이컨의 추(醜)는 단순한 혐오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진실의 그림자다. 아름다움이 현실의 고통을 덮어 가린다면, 베이컨은 그 장막을 찢어버림으로써 ‘추함 속의 진실’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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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 삼부작. 196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197,5 x 147 cm.

2020년 1월. 현대미술관, 뮌헨, 독일 ©morgen


날것의 미학,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

베이컨이 고통의 심연을 드러냈다면, 장 뒤뷔페는 추함 자체를 예술의 새로운 언어로 끌어올린 화가였다. 그는 ‘아르 브뤼(Art Brut, 날것의 예술)’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기존 미술 제도의 안락한 아름다움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뒤뷔페의 그림은 투박하고, 비례도 무너져 있으며,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 같았다. 때로는 정신병자들의 그림이나 민속적 장식에서 착안하기도 했다. 그는 세련된 아름다움이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가리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거칠고 원초적인 추함 속에서 오히려 살아 있는 힘, 창조의 에너지를 발견했다.

뒤뷔페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미라 부르는 그 부드럽고 매끈한 것들이, 혹시 죽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의 추는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 억압된 감각을 해방하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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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 <머리 Head> 1947. 2021년 7월. 쥬리히 미술관, 쥬리히, 스위스. ©morgen


베이컨과 뒤뷔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적으로 미와 추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베이컨은 고통과 왜곡을 통해 미의 허위를 찢어버렸고, 뒤뷔페는 추함 자체를 긍정하며 미의 규칙을 해체했다.

결국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다. 추(醜) 속에서 미(美) 가 빛나고, 미 속에서 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 미가 하늘 위의 별이라면, 베이컨과 뒤뷔페가 보여주는 미는 진흙탕 속에서 번뜩이는 한 줄기 불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를 배제하는 적이 아니라, 인간 삶의 두 얼굴이다. 예술은 그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아름답다고 믿는 것은 진정 아름다운가? 당신이 추하다고 외면하는 것 속에, 더 근원적인 진실은 숨어 있지 않은가?”


아르 브뤼 Art Brut

아르 브뤼는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가 만든 용어다. 우리말로는 “거친 예술” 혹은 “가공되지 않은 예술”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뒤뷔페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정신병원 환자,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 혹은 순수 아마추어—이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 특별한 힘을 발견했다. 그들의 그림과 조각은 미술관이나 화랑의 기준, 화려한 기법과는 상관없이 내적 충동과 본능에서 직접 나온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뒤뷔페는 이 작품들을 모아 “아르 브뤼 컬렉션”을 만들었고, 오늘날 스위스 로잔에 있는 "아르 브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아르 브뤼는 이후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어, 현대미술이 기존의 제도나 미적 기준을 넘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아르 브뤼는 정제되지 않은 예술이 지닌 원초적 힘을 보여주며,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져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경계에서 빛나는 얼굴들

라파엘로와 워터하우스는 추를 배제한 채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베이컨과 뒤뷔페는 정반대로, 아름다움이 외면한 고통과 거칠음을 붙잡았다. 그들의 길은 달랐지만, 네 화가가 보여준 것은 결국 한 가지다. 미와 추는 서로를 배제하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서 서로를 비추며 온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움만으로는 공허하고, 추함만으로는 파괴적이다. 그 경계에서 우리는 인간 삶의 두 얼굴을 마주한다. 예술은 경계 위를 오가며 묻는다. “당신이 아름답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당신이 추하다고 외면하는 것 속에, 더 깊은 진실은 숨어 있지 않은가?”



5부 예술의 경계 - 실제 작품 중심

23화 영화 속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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