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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에 혼자가 되게 생겼다(5)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 (1) 나는 학교가 싫다

  아직도 불쑥불쑥 어린아이 같은 설움이 튀어나온다.

전에는 그게 무언 지 몰랐다.

섭섭하고 서럽고 떼를 쓰고 싶은 부끄러운 감정이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내가 20대에 돌아가셨고 엄마도 내 나이 40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외롭고 서러울 때 누구한테 떼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불쌍한 어린애, 웃지 않는 어린이, 아무도 나를 이뻐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심술이 나고 얼굴은 더 미워졌다. 컵 속의 흙탕물이 잠잠해지면 흙이 가라앉듯 마음이 잠잠한 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어른의 얼굴이다. 하지만 작은 탁자의 흔들림에도 컵은 요동치며 흔들렸고 가라앉았던 흙탕들은 다시 물 위로 올라왔다. 참아야 하는데 참아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흙탕물은 다시 뿌예졌다.


이 나이가 되도록 초등학교가 싫다.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학교가 싫다. 높은 담장, 아이들의 등교시간이 끝나면 굳게 문이 닫힌 저 운동장이 싫었다. 그 문밖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어린 내가 있었다. 

학교는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곳은 정글, 발가벗겨져야 하는 곳이다. 

학교가 싫었다. 학교 가기가 싫었다. 학교 가는 것이 무서웠다.


학교를 간다고 나서서는 교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근처 만화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온갖 이야기가 가득한 만화책을 보자 나는 단박에 빨려 들어갔다. 학교가 파하는 시간까지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봤다. 그다음 날도 엄마에게 동전 몇 개를 얻어서 만화가게로 갔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와서는 학교 앞 만화가게로 갔다. 만화가게 주인은 할머니였는데 나중에는 나한테 잠깐 가게를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밀려들던 때여서 그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학교 교실이 부족했다. 학년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눴다. 만화가게 주인 할머니한테 오후반이라고 속이고 오전 내내 만화를 보고 오후가 돼야 가게를 나왔다. 일주일 정도 학교를 무단결석을 하니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집엘 찾아왔었다. 그날 아버지를 피해서 어디론가 정신없이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엔 어찌 됐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내게도 재주가 있었다. 글을 쓰는 재주였다. 

어쩌다 써낸 글이 교육감 상을 받게 됐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아침 조회시간에 강단 앞으로 나와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로 글짓기 대회가 있으면 대표로 참석했다. 어린 나는 이야기를 꾸며내기가 힘들었을 거고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썼다. 한 번은 막노동에 지쳐가는 아버지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내 글에는 가난이 뚝뚝 묻어났다. 그 글이 이번엔 장학사 상을 받게 됐다.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는지 그 글을 아이들 앞에서 읽게 했다. 나는 싫었다. 나는 반 아이들에게 이 글을 들려주려고 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고 마음이 아파서 쓴 거였다. 내가 싫다고 하니 선생님은 억지로 자기가 읽겠다며 내 손에서 원고뭉치를 잡아챘다. 너무 화가 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가 감동을 받으면 나의 의지는 무시당해도 되는 건가? 그 폭력과도 같은 독선에 어쩔 줄 몰라서 선 채로 울었다. 그 이후에는 또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이래 저래 나는 학교가 싫었다. 물론 선생님들도 나를 싫어했다.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초등학교 학부모가 된 어느 날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무심결에 학교 운동장을 보았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당황스러웠다. 어디서 온 눈물인지 몰랐다. 그냥 그 앞을 지나고 있을 뿐인데 눈물이 터졌고 멈추지를 않았다. 그날 알았다. 나의 유년은 아직도 운동장 구석 턱에서 울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른인데 아직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울고 있다. 나는 너무 가난했고 까맣고 불쌍했다. 그랬지만 언제나 눈이 이글이글 타올라서 어른들은 내가 싫었을 거다. 

나는 학교가 싫다. 나는 학교가 싫다. 나는 학교가 싫다. 나는 학교가 싫다. 








  아이를 낳고 외로운 모성의 대물림을 끊고 싶어서 심리학 책과 육아 서적을 읽었다. 그랬다. 육아를 책으로 배웠다. 그게 내게는 최선이었다. 안정적인 심리를 갖은 아이로 키워내고 싶었으나 그렇게 키워졌던 나 자신을 기억해내려고 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의 유년은 늘 빈 집, 나는 늘 외롭게 방치됐었다. 

마음이 흙탕물이 될 때마다 그 마음이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불가항력인 날이 많았다. 자주 우울해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참고 참았다. 겨우 겨우 버티며 육아를 했다. 난 정말 노력했다. 그것이 최선이었냐고 묻는다면 최선은 아니었지만 차선은 됐을 거라고 항변하고 싶다. 그 차선은 나의 전력투구였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됐을 때

어느 날, 초등학교 앞을 지나면서 알았다.

와락 쏟아지던 그 울음이 사라 진걸. 덤덤하게 운동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 그때는 내가 이 길을 지나면서 내 설움에,  불쌍한 어린 나에 대한 연민에 와락 울었지.

이제는 울지 않고 이 길을 가는구나. 이제 정말 어른이 됐나 보다.


하지만

여전히 흙탕물은 흙탕물이다.

처음서부터 맑은 물은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 지나가며 툭 하고 탁자를 치면

컵이 흔들리며 가라앉았던 흙이 올라와서 섞여버리고 뿌옇게 된다.

어쩔 줄 모르겠다. 또 이맘이 찾아왔구나. 또 내가 우는구나.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이렇게 돼 버렸다는 걸 받아들인다.

한차례 소용돌이치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뿌옇게 올라왔던 부유물이 가라앉고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어떤 외로움은 대면하기가 정말 괴롭다.

자신이 방치됐다는 느낌,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

책만이 유일한 친구여서 미친 듯이 책으로 도망쳤던 어린 시절,

책을 진절머리가 나도록 읽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는 오직 방구석에 처박혀서 20권이 넘는 한국 단편 문학전집을 모두 읽었다. 거의 모든 작가의 모든 작품을 샅샅이 읽었다.

아직도 그 더운 여름날 어두운 방 안에서 책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무얼해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고 채워지지도 않은 채 꾸역꾸역 밑으로 눌리고 눌렸다.

켜켜이 쌓이고 화석이 됐다.

어느 날 그 화석 같은 외로움은 어느덧 공포라는 괴물로 변해 있었다.


"외롭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무섭다"라고 말하는 게 나는 더 맘이 편하고 가벼웠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외롭다고 하면 부끄러웠다. 부모님에게 미안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부모로 부터 방치된 건 사실이지만 엄마도 사실 어쩔 수 없지 않았던가?


무섭다고 하면 괜찮았다.

"나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외로워" 보다

"나 혼자 있으면 너무 무서워"가 한결 가볍게 느껴졌고 부모님을 나쁘게 만들지 않아도 됐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어린 시절에도 외롭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늘 무섭다고 말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사실은 나는 너무 외로웠었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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